5000억 시장의 그늘, 권리 찾아 나선 뮤지컬인들 [뮤지컬 협회 분화, 무엇을 바꾸나①]
입력 2026.11.06 06:14
수정 2026.11.06 06:14
배우협회 출범·창작자협회 추진…제작사협회 이어 직군별 단체 잇따라
‘친정엄마’ ‘여명의 눈동자’ ‘드림하이2’ 체불 잇따라…예술인 신문고 신고 4년 새 1000건 넘어
한국뮤지컬협회 “산업 성장에 따른 자연스러운 분화”
지난 9월 뮤지컬계에서 직군 단체 두 곳이 잇따라 움직였다. 한국뮤지컬배우협회(이하 배우협회)가 9월 17일 서울 중구 정화예술대학교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배우 정영주를 초대 이사장으로 선임했고, 같은 달 28일에는 작가·작곡가들이 같은 장소에서 한국뮤지컬창작자협회(가칭·이하 창작자협회) 창립을 위한 첫 포럼을 열었다. 2021년 출범한 한국뮤지컬제작사협회(이하 제작사협회)까지 더하면 제작·출연·창작 세 직군이 각자의 단체를 갖추게 된다.
배우협회는 이건명·송용진·김아선·양준모·김아영을 이사로, 안유진을 감사로 선임했다. 창립 당시 80명이던 발기인은 현재 130명 정도로 늘었고, 최정원·정성화·신영숙·엄기준·김소현·홍광호·김준수 등도 출범 취지에 공감하며 힘을 보탰다. 창작자협회 창립준비위원회에는 작곡가 다미로를 비롯해 약 30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첫 포럼에는 작곡가 김성수·이진욱·박정아, 작가 오세혁·한아름·추정화·성종완 등이 온·오프라인으로 함께했다.
한국뮤지컬배우협회 창립총회 ⓒ한국뮤지컬배우협회
직군 단체가 잇따라 생긴 배경에는 산업 규모와 보호 장치 사이의 격차가 있다. 예술경영지원센터의 ‘2025년 공연시장 티켓판매 현황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뮤지컬 티켓판매액은 4989억원으로 전년보다 7.2% 늘었고, 전체 공연 티켓판매액 1조 7326억원의 약 29%를 차지했다.
시장이 커진 만큼 제작사가 지는 위험도 커졌다. 한 공연 제작사 관계자는 “티켓 가격 인상으로 전체 매출은 늘었지만 공급 과잉으로 작품당 실질 수익성은 떨어졌다”고 진단했다. 국내 공연은 2~3개월 단위로 작품이 바뀌는 리미티드런이 일반적이어서 제작사는 짧은 기간 안에 제작비를 회수해야 하고, 흥행 위험을 줄이려 티켓 파워가 검증된 배우를 찾다 보니 스타 의존도와 출연료가 함께 오르는 구조라는 설명이다.
흥행에 실패한 작품의 손실은 고스란히 정산 지연으로 이어진다. 한 현역 뮤지컬 배우는 “공연이 성공하지 못하면 출연료를 미지급하고 다음 공연 투자를 이용해 카드 돌려막기식으로 공연을 이어가는 제작사들도 있다”고 말했다.
체불은 대극장과 중소극장, 라이선스와 창작 작품을 가리지 않고 반복됐다. 2010년 뮤지컬 ‘친정엄마’ 초연부터 출연해 온 고(故) 김수미는 2024년 출연분 출연료 1억 6000만원을 받지 못한 채 같은 해 10월 세상을 떠났다. 함께 출연한 이효춘도 출연료 전액을 받지 못했고, 무대·음향·조명 스태프까지 포함한 체불액은 약 4억원에 이른다는 증언이 나왔다. 한국연예매니지먼트협회 상벌조정윤리위원회와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은 올해 4월 제작사 티오엘 스토리에 즉시 지급을 요구했고, 응답이 없자 ‘불량 제작사’ 지정과 업계 퇴출을 경고했다.
3월에는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 배우·스태프 63명이 성명을 내고 제작사 넥스트스케치가 1차 공연 보수의 20%를 지급하지 않았고 연장 공연에서도 미지급이 이어져 체불액이 약 2억 2000만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공연은 당일 취소를 거쳐 조기 종료됐다.
창작뮤지컬 ‘드림하이’ 시즌2도 같은 문제를 겪었다. 2025년 4~6월 서울 우리금융아트홀에서 공연한 이 작품은 폐막 후 몇 달이 지나도록 주연과 조연, 앙상블 배우들의 출연료가 지급되지 않아 체불 규모가 억대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제작사 아트원컴퍼니는 지난해 12월 출연진이 많은 창작뮤지컬이라 비용이 예상보다 늘었다고 해명하며 정산을 약속했지만, 올해 6월까지도 정산을 마치지 못했다. 출연 배우 영재는 7월 “이제 거의 1년”이라며 다시 문제를 제기했고, 제작사는 8월 사과문을 내고 시즌2 배우·댄서·스태프의 미지급액을 다시 확인해 지급했거나 지급 중이라고 밝혔다.
뮤지컬 '드림하이2' 공연 ⓒ아트원컴퍼
대학로 중소극장 무대에서도 같은 일이 되풀이됐다. 2016년 4월 대학로에서 공연하던 뮤지컬 ‘로맨틱 머슬’은 출연료가 약속한 날짜에 지급되지 않자 배우들이 공연 30분 전 보이콧을 선언해 공연이 취소됐고, 작품은 조기 폐막했다. 2019년 2월 막을 내린 한 대학로 뮤지컬에서는 제작사 대표와 연락이 끊기자 스태프들이 입금 마감일을 통보하고, 기한을 넘기면 대학로 곳곳에 성명서를 붙여 공론화하겠다고 알린 뒤에야 밀린 임금을 받았다. 액수가 크지 않은 체불이 법정까지 간 경우도 있다. 2020년 1~2월 공연한 한 뮤지컬의 앙상블 배우 2명은 50회 공연 출연료 가운데 각각 142만 5000원과 180만원을 받지 못해 근로복지공단과 소송을 벌였다. 두 작품 모두 작품명과 제작사는 공개되지 않았다.
제작사협회는 최근 체불 논란이 불거진 제작사들이 협회 회원사가 아니라고 밝혔다. 한승원 제작사협회 회장은 “협회에는 한국 뮤지컬 시장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50여 곳의 주요 제작사가 가입돼 있으며, 가입 심사 단계부터 채무불이행 이력과 관련 법령 준수 여부를 엄격히 검토해 문제를 일으키는 제작사의 가입을 제한하고 있다”며 “협회가 파악한 범위에서 회원사들의 고의적·지속적인 채무불이행이나 법정 의무 위반 사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일부 외부 제작사에서 체불과 안전망 부재가 반복되는 현실을 매우 안타깝고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출연료 체불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사후 대책 마련 이전에 피해를 실질적으로 예방할 구조적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뮤지컬 제작 현장의 체불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22년 9월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의 보장에 관한 법률’(예술인권리보장법)이 시행된 뒤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가 처음 내린 시정명령의 대상도 뮤지컬 제작사였다. 2022년 약 두 달간 공연에 출연한 청년 배우 6명에게 출연료 약 5700만원을 주지 않은 사건으로, 당시 예술인 신문고에 들어온 신고 가운데 출연료 미지급 사건이 56.2%를 차지했다.
신고는 해마다 늘고 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문체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2년 9월 예술인 신문고가 문을 연 뒤 올해 8월까지 접수된 신고는 1012건이다. 연도별로는 2023년 169건, 2024년 194건, 2025년 316건이었고 올해는 8월까지 290건이 들어왔다. 유형별로는 수익배분 거부·지연·제한이 581건(57.4%)으로 가장 많았다. 처리에는 평균 366.6일이 걸렸고, 처리를 마친 사건의 39.1%는 1년 이상 걸렸다. 민법상 출연료 채권의 소멸시효가 1년이어서,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신고와 별도로 소송을 통해 채권을 확보하라고 권하고 있다. 재단의 법률상담 건수도 2014년 86건에서 2025년 1402건으로 16배 넘게 늘었다.
돈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영주 이사장은 협회를 만든 계기로 “고용보험이나 산재보험을 제작사가 가입하지 않고 공연을 개막했고, 공연 중 부상 당했는데도 그에 대한 처우를 받지 못한 사례를 총회 직전에도 제보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사회적으로는 예술인 노동자에게도 국가 차원의 혜택을 마련하고 있지만, 배우들이 느끼고 인식하는 부분은 많이 뒤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며 “이 모든 것은 배우들도 함께 움직여야 제도가 개선될 수 있다”고 했다.
한국뮤지컬창작자협회(가칭) 창립 준비 포럼 ⓒ연합뉴스
체불이 반복되는데도 그동안 문제가 잘 드러나지 않은 것은 업계 구조 때문이다. 캐스팅이 인맥과 평판에 크게 좌우되는 환경에서 체불을 공론화하거나 소송을 낸 배우는 차기작 캐스팅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부담을 안는다. 창작자 사정도 비슷해서, 포럼에서는 신인들이 계약서의 비밀유지 조항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외부에 알리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왔다. 정 이사장은 “현재의 뮤지컬 산업 구조로 보자면 더 이상의 침묵은 대책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배우협회 출범에 힘을 보탠 정성화도 “준다고 해놓고 차일피일 미루고 안 주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는데, 중소극장에서는 아직도 그런 일이 있다고 들었다”며 “그런 부분이라면 우리 배우들이 같이 싸워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배우 유니온은 외국에도 많은 제도인데 우리나라에만 특이하게 없었다”고 했다.
창작자협회는 배우협회 출범을 계기로 갑자기 추진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다미로는 “신인 시절부터 오세혁 작가와 창작자들의 권익 보호에 관해 꾸준히 이야기를 나눠 왔고, 구체적으로 협회 설립 논의를 시작한 것은 2025년 2월경”이라며 “창작 활동을 하면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적이 있는데, 가장 답답했던 것은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도 도움을 요청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오랜 시간 고민해 온 문제를 더 이상 개인의 경험이나 개별적인 대응에 맡겨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기존 단체로는 직군별 현안을 다루기 어려웠다는 점도 분화를 앞당겼다. 1991년 같은 이름으로 발족해 2006년 사단법인으로 다시 출범한 한국뮤지컬협회에는 1200여명이 회원으로 있다. 이종규 한국뮤지컬협회 이사장은 “창작자, 배우, 제작자, 무대 스태프 등 각 직군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하나의 협회가 모든 직역을 대변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며 “각 분야의 전문성을 담아낼 직군별 단위 협회 출범은 오래전부터 필요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다만 “협회 내부에 특별한 이해 충돌이 있었다기보다 최근의 단위 협회 활성화는 산업 발전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다”며 “산업 초기에는 업계 주체가 모두 참여하는 연합체가 장르를 대표해 왔지만, 산업이 성장하고 고도화될수록 각 주체의 역할도 커지고 분화하기 마련이어서 분야별 요구를 수렴할 단위 협회가 필요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뮤지컬협회는 한국뮤지컬어워즈 운영과 뮤지컬산업 진흥법 제정 추진 등을 맡아 온 정책 연합체 성격을 유지할 방침이다.
두 협회는 모두 법인 설립 절차를 밟고 있다. 배우협회는 사단법인 인가를 받은 뒤 정식으로 회원을 모집하고, 배우 실태조사와 표준계약서 확산 교육을 먼저 추진할 계획이다. 창작자협회는 사단법인 설립 서류 준비를 마치고 TF 구성을 마무리하는 단계로, 내년 1월 발대식을 목표로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