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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진 손이 건넨 하루 [조남대의 은퇴일기(111)]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6.11.04 08:09
수정 2026.11.04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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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무게는 저마다 다르다. 거리나 시장을 지나다 보면 눈에 밟히는 손을 만날 때가 있다. 이제는 쉬어도 될 나이에 무엇이 그들을 거리로 나서게 했을까. 사연은 알 수 없지만, 굽은 허리로 묵묵히 삶을 이어가는 모습을 마주하면 나도 모르게 걸음을 늦추고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내가 무심히 누려온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온몸으로 버텨내야 하는 하루임을 깨닫는다.


지하철역 입구에서 전단지를 나눠 주는 할머니 ⓒ

후텁지근한 여름 아침, 지하철 출입구 앞에 선 할머니가 전단지 뭉치를 들고 있었다. 빌딩 숲 사이로 흩어지는 사람들을 향해 연신 손을 뻗었다. 행인들은 가까이 내미는 종이를 피해 멀찍이 돌아가거나 그대로 지나쳤다. 내민 손이 빈 채로 돌아올 때마다 뭉치의 무게는 여전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얼굴에는 어두운 기색이 없었다. “두 시간에 2만 원이나 버는데, 이게 어디냐”고 환하게 웃으며 전단지를 받아 주는 이들을 ‘착한 사람’이라 불렀다. 누군가 종이를 받아 들면 주름진 얼굴에 금세 미소가 번졌다. 이마에 땀이 맺히고 손에 든 뭉치는 좀처럼 줄지 않았지만, 내미는 손은 쉬지 않았다.


전단지를 받아 드는 시민들 ⓒ

가끔 두 손의 짐을 한쪽으로 옮겨 쥐며 전단지를 받는 사람도 보였다. 한 학생은 종이를 받아 들며 할머니께 고개를 숙여 깍듯이 인사했다. 전단지 한 장을 받는 짧은 행동에도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담길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훈훈해졌다. 할머니는 학생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나도 그 앞을 지날 때면 기꺼이 전단지를 받아 든다. 내용을 슬쩍 훑어본 뒤 호주머니에 집어넣을 때가 많다. 광고 효과만 따진다면 별 소용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종이 한 장을 받아 드는 것은 할머니의 노동에 보내는 나름의 응원이다. 전단지를 받을 때 내 손이 종이에 닿는 시간은 잠깐이다. 그러나 할머니의 손은 아침 내내 허공을 향해 뻗어 있었을 것이다. 그 앞을 서둘러 지나쳤던 날들이 떠오른다. 아침 지하철역 입구에서 건네받은 작은 전단지 한 장이 무심히 시작할 뻔한 하루를 돌아보게 한다.


라오스 커피 농장에서 열매를 수확하는 노인 ⓒ

할머니를 보고 있노라면 라오스 볼라벤고원의 커피 농장 ‘팍송하이랜드’에서 만난 풍경이 떠오른다. 한낮의 태양이 사정없이 쏟아지는 농장에서 모자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볕을 견디는 노인이 있었다. 주름진 손은 가지 사이를 헤치며 붉은 커피 열매를 하나씩 부지런히 따고 있었다. 하루 일을 마친 사람들은 먼지가 폴폴 나는 트럭 짐칸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집으로 돌아갔다.


당시 현지인은 평소 하루 품삯이 몇백 원에 불과하고, 한창 수확 철에도 종일 땀 흘려 손에 쥐는 돈이 이삼천 원 남짓이라고 알려주었다. 내가 마시는 커피 한 잔의 값이 그들에게는 온종일 허리를 굽혀야 겨우 손에 쥘 수 있는 돈이었다. 넉넉지 않은 수입으로 하루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생활은 찌는 듯한 더위만큼이나 고단해 보였다. 그날 이후 커피를 마실 때면 잔보다 먼저 붉은 열매를 따던 손이 떠오른다. 한 모금의 향을 즐기는 동안에도 노인의 손이 견뎌야 했던 긴 하루를 생각하게 된다.


커피 농장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

숨 막히는 더위와 넉넉지 않은 벌이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던 얼굴은 지하철역 할머니의 밝은 표정과 닮아 있었다. 국경과 언어는 달라도 자신의 노동으로 하루를 꾸려가는 모습은 다르지 않았다. 손에 쥐는 돈이 적어도 오늘의 일을 해내려는 의지가 주름진 손끝에 배어 있었다. 타국의 커피 농장에서 만났던 할머니의 땀을 다시 생각했다. 붉은 커피 열매를 따던 손이 서울의 아침 풍경 위로 선명하게 겹쳐 보였다.


시장 길가의 좌판에서 채소를 파는 할머니 ⓒ

하루 일과를 마치고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저녁이면 전통시장 앞을 지나간다. 낮 동안 달구어진 보도블록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길가에 작은 좌판이 놓여 있다. 그 곁에 나이 든 여인이 쪼그리고 앉아 있다. 대바구니에는 팔리지 않은 여름 나물이 듬성듬성 남아 있다.


어둠이 내려도 할머니는 자리를 뜨지 않는다. 시든 잎을 골라내고 흐트러진 나물 단을 다시 묶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살핀다.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훔친 뒤 치마에 닦는다. 버스가 한 차례 사람들을 쏟아놓을 때마다 눈빛이 잠시 살아났다가 이내 가라앉는다. 걸음을 재촉하는 행인들을 바라보는 눈에는 남은 나물을 어떻게든 팔고 돌아가려는 간절함이 어려 있었다.


좌판에서 채소를 사는 남성 ⓒ

그때 퇴근길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좌판 앞에 멈추었다. 그는 남아 있던 나물을 모두 집어 들었다. 할머니가 거스름돈을 건네려 하자 손사래를 쳤다. “할머니, 날도 더운데 이제 들어가 쉬세요.” 그 말에 할머니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비워진 대바구니를 들여다보던 얼굴이 어린아이처럼 환해졌다. 남자는 나물 봉지를 들고 시장 골목으로 사라졌고, 할머니는 천천히 좌판을 걷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그러면서도 내일이면 할머니가 같은 자리에 앉아 다시 손님을 기다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선뜻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자의 다정한 한마디가 할머니에게는 나물이 모두 팔린 일만큼이나 반가웠으리라. 안도하는 표정 위로 전단지를 나눠 주던 할머니와 커피 농장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서로 닮은 세 사람의 하루가 무사히 끝나는 것 같아 다행스러웠다.


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돌아보는 필자 ⓒ

집에 돌아와 가방 속에서 눅눅해지고 구겨진 전단지를 꺼내 놓는다. 식탁 위의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시며 나물 반찬을 바라본다. 내가 무심코 지나쳐 온 평범한 일상에도 뜨거운 여름을 견디며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일한 이들의 땀이 배어 있음을 느낀다. 전단지를 내밀던 손과 붉은 열매를 따던 손, 시든 나물 잎을 골라내던 손이 차례로 떠오른다.


나이가 들어서도 일손을 놓지 못하는 속사정을 다 헤아릴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들의 노동을 그저 동정의 눈으로만 바라볼 일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하루를 꾸려가는 수고가 있고, 그 수고는 가볍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눈앞에 내민 손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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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대 작가 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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