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 “‘실낙원’ 소영, 모성애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물” [인터뷰]
입력 2026.10.31 14:35
수정 2026.10.31 14:35
하이틴 스타에서 장르물까지 꾸준한 변신
‘지옥’·‘정이’·‘선산’ 이어 ‘실낙원’까지, 연상호 감독과 또 다시 호흡
하이틴 스타로 대중의 눈도장을 찍었던 김현주가 올해 데뷔 30주년을 맞았다. 1996년 데뷔한 그는 ‘유리구두’, ‘토지’, ‘반짝반짝 빛나는’, ‘애인 있어요’ 등을 통해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동시에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청춘스타에서 멜로와 가족극, 시대극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한 데 이어 최근에는 스릴러와 SF 등 장르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특정 이미지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인물에 도전하며 30년의 필모그래피를 채워왔다.
특히 연상호 감독과의 만남은 김현주의 연기 행보에서 눈여겨볼 만한 변화다. ‘지옥’에서는 신념을 지키는 변호사 민혜진을, ‘정이’에서는 전설적인 용병의 뇌를 복제한 인공지능(AI) 전투 로봇을 연기했다. ‘선산’에서는 가족의 죽음과 얽힌 비밀을 마주하는 윤서하로 극을 이끌었다.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세계관 속에서 각기 다른 인물의 감정과 내면을 그려내며 장르물에서도 입지를 다졌다.
김현주 ⓒCJ ENM
그 연장선에 놓인 작품이 연상호 감독의 신작 ‘실낙원’이다. 지난 21일 개봉해 누적 관객 12만 명을 넘어선 이 영화는 9년 전 아들을 잃은 어머니 류소영(김현주 분)에게 죽은 줄 알았던 아들 류선우(배현성 분)가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심리 스릴러다. 소영은 그동안 AI로 재현한 어린 아들과 살아왔다. 성인이 된 아들의 귀환으로 오랫동안 유지해 온 일상에 균열이 생기면서 현실과 가상, 모성애와 집착의 경계가 흔들린다.
김현주는 이번 작품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넘어 상실이 인간에게 남기는 흔적을 파고들었다. 모성애라는 익숙한 감정에 기대기보다 아들을 잃은 뒤 멈춰버린 시간과 그 안에서 자라난 집착, 소유욕에 주목했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돌아왔는데도 선뜻 반기지 못하는 소영의 복잡한 심리 역시 이러한 접근에서 출발했다.
"저는 모성애를 표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인간에게 상실감이라는 게 어떤 건지, 어떤 작용을 하는지 더 깊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엄마였다면 오히려 연기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겠죠. 그렇다고 모든 걸 직접 겪어봐야 연기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감독님은 인간의 본질에 관해 질문하고 싶었다고 하셨는데, 저는 상실감에 집중했어요. 9년 만에 선우가 돌아왔을 때 즉각적으로 모성애가 발동할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 있잖아요. 그렇다면 모성애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런 질문을 많이 했어요."
소영은 돌아온 선우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들의 생존을 확인하고도 기쁨보다 경계심을 드러내는 모습은 통상적인 모자 상봉과 거리가 멀다. 그 반응을 이해하려면 소영이 AI 선우와 보낸 9년을 들여다봐야 한다.
"만약 실종된 아들을 계속 찾고 있었다면 달랐을 거예요. 살아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기다렸다면 울면서 반가워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소영은 아들이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했고, 그 죽음을 잊고 회피하며 살아왔어요. AI 아들과 자신만의 완벽한 삶을 구축한 거죠.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낯선 남자가 나타나 그 삶을 깨뜨리는 거예요. 어쩌면 방해꾼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겠죠. DNA 검사로 확인됐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내 아들이라는 감정이 생길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게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9년 동안 전혀 다른 삶을 살았으니까요."
영화에서 소영의 지난 9년은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침대에서 눈을 뜨고 안경을 쓰는 첫 등장 장면은 그 공백을 짐작하게 하는 단서다. 생기를 잃은 듯한 눈빛과 건조한 표정에는 오랜 시간 축적된 피로와 상실감이 배어 있다. 김현주는 소영의 상태를 수분이 말라버린 생화에 빗댔다.
"저는 이미 소영의 삶이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밖에서는 직장 동료들과 잘 지내고 사회생활도 멀쩡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물 없는 생화 같은 사람이에요. 물을 주지 않아 말라가는 꽃처럼 억지로 삶을 이어온 거죠. 그런 상태가 아침에 눈을 뜨는 장면에서도 드러났으면 했어요. 영화에서 지난 9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장면이 많지 않거든요. 9년 후 처음 눈을 뜨는 모습이 소영의 첫 등장이에요. 그 짧은 순간에 그동안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단편적으로라도 보여줘야 했죠."
김현주ⓒCJ ENM
돌아온 선우가 AI 속 어린 자신을 위협할 때 소영의 반응은 더욱 격렬해진다. 아들을 보호하려는 마음처럼 보이지만, 그 분노의 이면에는 모성애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도 자리한다. 김현주는 소영이 아들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기는 측면이 있다고 봤다.
"소영이 온전한 정신 상태에서 반응하는 건 아니잖아요. 어린 선우가 상처받는 장면에서도 아이가 아파한다는 사실보다 누군가 내 영역을 침범했다는 감정이 더 컸던 것 같아요. 물론 모성애적인 반응도 있겠죠. 그런데 내 소유물을 누군가 훼손했다는 마음도 함께 있었던 거예요. 큰 선우가 자신의 존재를 지우겠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소영을 그런 인물로 해석하고 서사를 만들어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런 반응이 나온 것 같아요. 소영의 행동을 단순히 모성애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소영에게 AI 선우는 아들을 잃기 전의 시간을 붙잡아두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아이는 성장하지 않고, 소영 역시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기술이 제공하는 위로가 반드시 회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김현주에게도 여러 질문이 남았다.
"이게 과연 올바른 방식의 애도와 위로일까? 스스로 그런 질문을 했어요. 제대로 된 위로였다면 소영이 아침에 그렇게 눈을 뜨지는 않았겠죠. 우리가 휴대전화만 계속 들여다보다가 어느 순간 머리가 멍해지고 공허해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잖아요. 그런 생활을 9년 동안 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온전한 상태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AI 아들을 진짜 아들로 받아들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죠. 만질 수도 없으니까요. 그만큼 선우를 잃었을 때 이미 소영의 심리 상태가 온전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거의 중독이고 집착인 거죠."
소영과 달리 다른 부모들은 AI로 재현한 자녀와의 이별을 준비한다. 아이를 삭제하겠다는 결정은 소영에게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같은 상실을 겪었지만, 현실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다른 아이들은 자랐잖아요. 그런데 소영의 아이는 9년 동안 그대로 멈춰 있어요. 자라는 과정을 보지 못한 거죠. 다른 아이 사진을 보면서 '잘 자랐네요'라고 하잖아요. 섬뜩하게 표현하려던 건 아니지만, 그 대사 자체가 조금 섬뜩하다고 느꼈어요. 소영에게는 자기 아들이 가장 우선이니까 다른 아이들이 하나씩 사라지면 선우가 혼자 남게 되는 거예요. 소영이 계속 함께 있어 줄 수는 없잖아요. 아이들끼리 잘 지내고 있는데 굳이 삭제할 이유가 없는 거죠. 연두 아버지를 만나러 갔을 때도 상대방이 자기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소영은 듣지 않아요. 삭제한다는 사실에만 매달리죠. 이미 자기 세계에 너무 깊이 빠져 있는 거예요."
이웃인 수련과 하우는 소영이 외면해 온 현실을 다시 마주하게 하는 존재들이다. 특히 수련이 아이를 안고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장면에서는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다만 김현주는 소영의 반응을 부러움이나 그리움으로 단순화하지 않았다.
"보통이라면 '나도 저러고 싶다', '우리 아들이 그립다'는 감정을 표현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소영에게도 이미 아이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다만 관객들이 보기에는 그 모습이 아프고 짠하게 느껴졌으면 했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소영도 살아 있는 아이와 죽은 아이를 구분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하우를 살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됐고, 선우와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된 거죠. 소영도 죽으려고 했었잖아요. 아마 한두 번이 아니었을 거예요. 그런데 자살을 시도한 수련을 보면서 자신을 떠올렸을 것 같아요. 그때 '포기하지 마'라는 대사를 하거든요.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겠죠."
'실낙원' 스틸 ⓒCJ ENM
소영의 태도는 AI 회사를 방문해 물에 담긴 조화를 발견하면서 달라진다. 생명이 없는 꽃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존한 모습은 그동안 자신이 붙잡아 온 세계를 돌아보게 만든다. 이후 선우에게 오므라이스를 만들어주는 장면은 소영의 선택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때부터 '내가 살아 있지 않은 아이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척하고 있었구나'라는 걸 깨달은 것 같아요. 소영 앞에는 AI 아들과 돌아온 선우, 그리고 살아 있는 하우가 있잖아요. 저는 단순히 두 아들 사이에서 선택하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우까지 포함된 선택이라고 봤거든요. 오므라이스는 엄마로서 해주지 못했던 음식이에요. 아이가 마지막으로 먹고 싶어 했던 음식을 이제야 해주는 거죠. 마지막으로 해주는 음식이기도 하고, 현실을 인정하는 순간이기도 해요. 또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이가 원하는 걸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현실을 인정하는 마음도 있었죠."
결말에서 소영은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다. 아이를 구원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지만, 그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관객에게 남겨진다. 김현주는 배우로서 인물의 심리를 이해하면서도 그 행동까지 옳다고 볼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공감하지 못했다면 연기할 수 없었겠죠. 그렇지만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잘못된 선택이죠. 사실 살인이잖아요. 그런데 소영은 계속 그곳을 지옥이라고 표현하잖아요. 결국 아이를 구원하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어떤 어머니가 영화를 보고 자신도 그런 선택을 할 것 같다고 말씀하셔서 깜짝 놀랐어요. 그분은 못난 자식이라도 자신의 자식이고, 그 죄까지 끝까지 안고 가겠다는 마음을 이야기하시더라고요. 소영도 그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내가 함께 죽으면 끝까지 같이 있어 줄 수 있는 거잖아요. 물론 소유욕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죠. 끝까지 아들을 놓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볼 수도 있고요. 우리 영화가 그런 점에서 어렵고 재미있는 것 같아요."
영화의 마지막은 소영이 어떤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김현주는 자신만의 설정을 통해 인물의 마지막 감정을 정리했다. 그가 상상한 소영의 세계에는 성인이 돼 돌아왔던 선우와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낙원으로 갔으니 행복해야 하죠. 소영이 스스로 선택해서 그곳에 간 거잖아요. 저는 소영이 9년 후 아들이 돌아왔던 기억을 지워달라고 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냥 소영에게 선우는 어제 만났고 오늘도 만나는 아들인 거예요. 반가워할 필요도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 장면이 어려웠어요. 어떻게 해석하고 연기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죠. 평소에는 감독님과 그렇게 깊게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아닌데, 그 장면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많이 나눴던 것 같아요."
‘실낙원’은 제한된 촬영 회차와 소규모 인력으로 완성됐다. 김현주에게 이번 현장은 기존의 대규모 제작 환경과 다른 경험을 안겼다. 배우와 제작진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현장에서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도 한층 자유로워졌다.
"인원이 적다 보니까 친구들끼리 알음알음 모여서 영화를 만드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물론 다들 베테랑이기 때문에 쉬엄쉬엄 만들었다는 뜻은 아니에요. 오히려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볼까?' 하면서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 많았어요. 이전에는 제가 한 인물을 연기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강했다면, 이번에는 프로젝트의 일원으로서 함께 움직이고 만들어낸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촬영 기간이 짧으니까 집중도도 높았고요. 연기도 굉장히 날것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마치 현장에서 대본을 받아 바로 연기하는 것 같은 생생함이랄까요. 이번 작품에는 그런 시스템이 오히려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김현주와 연상호 감독은 ‘지옥’, ‘정이’, ‘선산’ 등에 이어 다시 호흡을 맞췄다. 여러 작품을 함께하는 동안 두 사람의 작업 방식에도 익숙함이 쌓였다. 다만 김현주에게 연상호 감독은 편안한 동료이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요구하는 창작자다.
"저는 원래 새로운 도전을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오히려 안정적인 걸 좋아하죠. 위험한 곳에는 잘 안 가고 낯선 곳도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낯선 곳에 가보기도 하고, 그런 경험에서 영감을 얻는 방법도 알게 됐어요. 감독님이 계속 새로운 도전을 하게 하시잖아요. 그러면서 저도 몰랐던 제 이면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아요. 못할 것 같아서 안 하고 싶은데 묘하게 도전하고 싶게 만드는 심리를 자극하세요. 그런 면에서는 정말 감사한 존재예요. 끊임없이 저를 파헤치게 하고, 스스로 탐구하게 만드시니까요."
영화에서 AI는 상실한 존재를 되살리는 기술로 등장하지만, 현실에서는 배우의 영역까지 확장되고 있다. 사람과 직접 소통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김현주에게 이러한 변화는 낯설고 두렵다. 그러나 연상호 감독이 보여준 AI 영상은 그동안 갖고 있던 생각을 흔들어 놓았다.
"저는 터치스크린도 별로 안 좋아해요.(웃음) 병원에 가면 사람이 바로 앞에 있는데 키오스크를 이용하라고 하잖아요. 여기서 말하면 금방 끝날 일을 왜 굳이 기계로 해야 하나 싶어요. AI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좀 더 커요. 제 사고나 생각이 지배당할 것 같은 느낌이 있거든요. 예전에는 영상을 보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이거 만들어낸 거 아니야?'라는 의심부터 하게 되잖아요. 배우도 대체할 수 있게 되는 거고요. 저는 인간만이 표현할 수 있는 무언가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어요. 눈동자 깊은 곳에서 전해지는 감정 같은 건 AI가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연상호 감독님이 AI로 만든 영상을 보여주셨는데 연기를 정말 잘하더라고요. 무서울 정도였어요. 그래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어요. 가능할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무조건 거부하거나 두려워할 게 아니라 제대로 받아들이는 게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영화 속 소영과 달리 김현주는 세상을 떠난 사람을 AI로 복원하는 선택에 부정적이다.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가족이나 팬들이 AI로 재현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에게 상실은 기술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받아들여야 하는 감정이다. 오랫동안 함께한 반려견을 떠나보낸 기억도 여전히 생생하다.
"그리움은 그리움대로 남겨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영원한 건 없고 어떤 관계든 언젠가는 상실하게 되어 있잖아요. 어쩌면 우리가 그리워하는 건 상대방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했던 나 자신일 수도 있어요. 제가 강아지를 오래 키우다가 먼저 떠나보낸 적이 있어요. 그 후 3년 동안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를 때마다 강아지 소리가 들렸어요. 환청처럼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소리가 사라졌어요.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뒤 바로 다른 동물을 키우는 분들도 있잖아요. 그건 개인의 선택이죠. 하지만 새로운 아이가 먼저 떠난 아이와 똑같을 수는 없잖아요. 결국 위로받고 싶은 나 자신을 위해 대체할 존재를 찾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가족을 잃어봤고 친구도 잃어봤어요. 상실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모르는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아요. 언젠가 그 고통을 또 겪어야 하잖아요. 결국 감당해야 할 슬픔은 감당해야 하는 것 같아요. 슬픔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그냥 슬픈 대로 계속 슬퍼야 끝나는 것 같아요."
김현주는 과거 출연작이 온라인에서 다시 화제가 되는 현상을 쑥스러워했다. 예전 모습을 일부러 찾아보지 않는다는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현장에서의 위치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고 느낀다. 오랜만에 큰 스크린으로 확인한 자신의 연기 역시 마냥 만족스럽지만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야죠. 과거를 돌아봐서 뭐 하겠어요.(웃음) 사실 부끄러워요. 지금의 저와는 좀 다른 것 같거든요. 물론 어렸으니까 그럴 수 있죠. 기본적인 성격이 완전히 바뀐 건 아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진 부분이 있어요. 현장에서도 이제 선배님들보다 후배들이 더 많아졌잖아요. 사색하면서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시간도 많아졌고요. 이번에 큰 스크린으로 제 연기를 보니까 무섭더라고요. 부산에서 조금 제대로 봤는데 아쉬운 부분들이 많이 보였어요. 그렇지만 그런 게 보여야 다음 작품에서 성장할 수 있는 거잖아요. 자신감과 자존감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내가 잘한 것만 보이면 어떻게 발전하겠어요? 부족한 부분도 볼 줄 알아야죠."
‘실낙원’에서 상실과 집착이 뒤엉킨 인물의 내면을 그려낸 김현주는 여전히 자신이 보여주지 못한 얼굴이 많다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 다양한 장르와 캐릭터를 거쳐왔지만, 배우로서 새로운 인물을 만나는 일에 대한 호기심은 현재진행형이다.
"소시오패스 같은 역할도 해보고 싶어요. 요즘은 대부분 인물에게 나름의 서사가 있고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있잖아요. 그런데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인물이요. '쟤 왜 저래?' 싶은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있잖아요. 화도 안 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사람. 아무 색깔도 없는 캐릭터랄까요. 제가 굳이 이해하면서 연기할 필요도 없고, 관객에게 이해를 요구하지도 않는 그런 인물을 해보고 싶어요. 과격한 역할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액션이 과격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물 자체가 굉장히 과격한 거죠. 반대로 밝은 작품도 해보고 싶어요. 제가 제대로 된 로맨틱 코미디를 해본 적이 없거든요. 진한 멜로도 안 해봤고요. 정통 멜로도 좋을 것 같아요. 그렇다고 늘 이런 역할을 하고 싶다고 정해놓고 작품을 선택하는 건 아니에요. 그때그때 만나는 작품에 따라 달라지고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