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은 짓는데 전기는 어디서… 원전 빼고 반도체 전력 계산 되나 [데스크 칼럼]
입력 2026.10.28 14:15
수정 2026.10.28 14:16
공론화위 300명 앞에 놓인 '텅 빈 콘센트'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원자력안전위원회가 고리 3·4호기의 계속운전을 위한 운영변경을 동시에 허가했다고 27일 밝혔다. 사진은 고리원전 3·4호기. ⓒ뉴시스
▲ 1978년 4월 29일 지금의 부산 기장 바닷가. 고리 원전 1호기가 운전에 들어갔다. 외국 차관과 기술로 세운 국내 첫 상업 원전이었다. 공장은 줄지어 서는데 돌릴 전기가 모자라던 가난한 시절, 굴뚝만큼 절박했던 것은 전기를 꽂을 '국가 콘센트'였다. 고리 1호기는 그 콘센트였고 원자력 강국의 기틀을 닦은 첫 계단이었다.
반세기 만에 한국은 다시 거대한 콘센트를 찾아 나섰다. 이번엔 반도체와 인공지능(AI)이다. 365일 24시간 1초도 멈춰선 안 되는 게 반도체 팹이다. 2018년 3월 삼성 평택 공장은 30분가량 전기가 끊겨 500억원을 날렸다. 그런 팹들이 모일 용인 클러스터 한 곳에만 기가와트(GW) 단위 전력이 쉼 없이 들어가야 한다.
AI 데이터센터는 '전기 먹는 하마'가 됐고 차와 공장도 전기로 갈아타고 있다. 첨단산업의 패권은 기술 못지않게 원하는 때 끊김 없이 청정 전력을 끌어올 수 있느냐에 달렸다. 원전 강국 프랑스가 차세대 원전 EPR2 6기 건설을 확정하고도 첫 가동을 2038년으로 잡은 이유, 일찌감치 탈원전을 선언했던 대만이 멈춰 세운 마안산 원전을 재가동하려 안전점검을 서두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이런 시점에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에 담을 신규 원전의 몫을 가늠하는 공론화가 시작됐다. 전문가 9명이 틀을 짜고 시민참여단 약 300명이 12월 11일부터 사흘간 숙의토론에 나선다. 소모적인 정쟁에서 벗어나 국가 전력 믹스에서 원전의 현실적 상한과 하한을 찾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여론의 속내는 여전히 이중적이다. 최근 한국에너지정보문화재단 조사에서 국민 82.9%가 원전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내 집 근처 건설 찬성은 56.3%로 차이를 보였다. 이 님비(NIMBY)의 간극보다 더 무서운 것은 '시간'이다. 반도체의 시계는 광속인데 원전의 시계는 너무 느리다. SK하이닉스 용인 1기 팹은 2년여 만인 2027년 5월 서는데, 새 원전은 14년이 걸린다. 공장은 당장 서는데 전기는 2040년에야 들어온다는 뜻이다.
다행히 지난 27일 원자력안전위원회가 멈춰 서 있던 고리 3·4호기의 10년 계속운전을 허가했다. 두 원전의 합산 출력(2050MW)이면 대형 반도체 공장 약 6곳을 돌릴 수 있다. 기존 부지와 전력망을 그대로 쓰니 시간과 비용 모두 신규 건설에 비할 바가 아니다.
물론 원전이 모든 문제를 푸는 만능 해법은 아니다. 재생에너지와 송배전망 확충도 필수다. 그러나 공장이 풀가동되는 피크 시간, 폭염과 한파 속에서도 24시간 365일 흔들림 없이 팹을 돌릴 기저 전력은 사실상 원전뿐이다. 실제 쉬지 않는 공장에 쉬지 않는 전원을 붙이는 퍼즐에서 원전을 빼고 현실적인 답을 내기는 어렵다.
▲ 따라서 이번 공론화가 권고 수치 몇 개를 내놓는 통과의례로 끝나서는 곤란하다. 전력수요 증가와 탄소중립 목표, 신규 원전 건설에 걸리는 시간을 함께 따져 원전 발전량 비중의 현실적인 하한과 상한을 제시해야 한다.
또한 정부는 이를 전기본의 구체적인 공급 일정으로 연결해야 한다. 이번 논의에서 제외된 개별 원전의 계속운전과 특정 지역 입지 문제는 별도의 절차로 풀되 부지 확보와 건설비 조달, 사용후핵연료 관리, 송전망 확충도 늦춰서는 안 된다.
뼈아픈 자성도 뒤따라야 마땅하다. 이념에 휘둘린 탈원전과 늑장 인허가로 고리 3·4호기와 한빛 1·2호기가 멈춰 선 채 허송세월하는 사이 허공으로 날아간 전력만 약 2530만 MWh(메가와트시)에 달한다. 전력 판매액으로 환산하면 2조원대의 기회비용이다.
반세기 전 누군가 온갖 불확실성을 뚫고 내린 결단 덕분에 우리는 스위치만 켜면 불이 들어오고 공장이 돌아가는 풍요를 누려 왔다. 전기는 이념의 구호가 아니라 국가가 살고 산업이 숨 쉬는 문제다.
2년이면 서는 팹과 14년이 걸리는 원전, 두 시계가 어긋나는 순간 청구서는 고스란히 기업과 국민 앞으로 날아온다. 그 청구서를 막을 첫 기회가 12월 숙의 테이블에 앉을 시민참여단 300명에게 있다. 이들이 그려야 할 것은 10여 년 뒤 대한민국의 산업과 일상을 지탱할 ‘국가 콘센트’의 밑그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