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잭팟에도 서민 지갑은 냉랭…수출 호황의 불편한 간극 [소문난 잔칫상 ①]
입력 2026.10.28 07:00
수정 2026.10.28 07:00
3분기 1.0% 성장에도 민간소비는 0.2% 감소
반도체, 고용 등 국내 연관산업 파급력 제한적
빅테크 AI 투자가 반도체 업황 지속성 좌우
부산 남구 감만 부두에서 수출입 컨테이너가 선적 및 하역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뉴시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
반도체 수출이 역대급 호황을 누리며 한국 경제의 성장세를 이끌고 있다. 기업 실적은 연일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지만 서민 살림살이에는 좀처럼 잔치 분위기가 퍼지지 않는 모습이다.
장바구니 물가와 대출이자 부담은 가계의 소비 여력을 압박하고 있다. 여기에 수도권 집값 상승과 높아진 대출 문턱까지 겹치면서 청년과 무주택자의 내 집 마련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수출 호황이 곧바로 국민 생활의 개선을 의미하지 않는 모습이 한국 경제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의 배경으로 반도체 중심의 편중된 성장구조를 지목했다. 일부 수출기업에 집중된 호황의 성과가 국내 고용과 연관산업, 가계소득으로 충분히 확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문제는 반도체 호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장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일시적으로 늘어난 세수를 소비 진작에 집중하기보다 미래 성장동력과 재정건전성 확보에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반도체가 차린 잔칫상에 국민 모두가 둘러앉을 수 있도록 성장의 성과를 경제 전반으로 확산하는 일이 한국 경제의 주요 과제로 떠올랐다.
인천국제공항 대한항공 화물터미널에서 관계자들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를 항공기에 적재하고 있다. ⓒ뉴시스
수출은 질주, 소비는 후진…반도체 호황의 그늘
한국은행이 27일 발표한 ‘2026년 3분기 실질 국내총생산(속보)’에 따르면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전기 대비 1.0% 성장했다. 수출은 2.3%, 설비투자는 4.1%, 정부소비는 1.9% 증가한 반면 민간소비는 0.2% 감소했다.
국민의 실질 구매력을 보여주는 실질 국내총소득(GDI)은 전기 대비 3.4% 증가했다. 반도체 가격 상승 등에 따른 교역조건 개선이 영향을 미쳤다. 경제 전체의 구매력은 크게 개선됐으나 민간소비는 감소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중심 성장의 산업적 특성에 주목했다. 수출과 기업이익이 증가하더라도 고용과 가계소득 전반으로 효과가 확산되기까지 시간이 걸리거나 전달 경로 자체가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반도체 특수가 성장을 이끌었지만 그게 곧바로 국민 주머니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항상소득이 증가해야 소비가 늘어나는 만큼 일시적인 호황만으로 소비가 크게 살아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GDP는 국내에서 얼마나 생산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여서 해외 수요가 급증하면 국내 소비 감소를 상쇄할 수 있다”라며 “반도체는 수출과 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고용과 국내 전후방 산업으로 파급되는 효과가 상대적으로 작다”고 설명했다.
특히 반도체 산업은 자동차와 달리 국내 연관산업으로 이어지는 효과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라는 분석이다.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일부 핵심 장비는 해외에서 들여오고, 생산된 반도체 상당수도 해외 데이터센터와 기업에 공급되기 때문이다.
염명배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도 “수출로 벌어들인 돈과 실제 국민이 쓰는 돈이 별개의 경로로 움직이고 있다”라며 “기업들이 미래 불확실성과 대미 투자 부담을 고려하다 보니 자금이 국내 소비와 투자로 충분히 순환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노르웨이 남서부 해안에서 140㎞ 떨어진 요한 스베르드루프 유전에서 원유를 채취하고 있다. 이 유전은 노르웨이 대륙붕에서 세 번째로 크며, 예상 매장량은 27억배럴에 이른다. ⓒ연합뉴스
노르웨이 석유기금의 교훈…호황기 세수 어디로
예상치 못한 호황의 성과를 장기적인 국가 자산으로 전환한 노르웨이의 사례가 재조명된다.
노르웨이는 1969년 북해에서 에코피스크 유전을 발견하고 1971년 석유 생산을 시작했다. 막대한 석유 수입이 유입되자 정부는 자원 수익을 당장 소비하기보다 미래 세대를 위해 축적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1990년 정부석유기금 설립을 법제화했고 1996년부터 실제 자금 적립을 시작했다. 이후 국부펀드인 ‘정부연기금 글로벌’을 통해 석유·가스 수입을 해외 주식과 채권 등 다양한 자산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운용했다.
핵심은 석유 수입을 한꺼번에 국내 경제에 투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르웨이는 2001년 재정준칙을 도입해 장기적으로 기금의 예상 실질수익률에 맞춰 재정을 운용하도록 했다. 현재 예상 실질수익률은 연 3%로 설정돼 있다. 다만 경기 상황에 따라 지출을 조정할 수 있어 매년 기금의 3%만 사용하도록 고정한 제도는 아니다.
이러한 구조는 석유 가격이 급락하더라도 정부가 재정 여력을 확보하고 자원 수익을 미래 세대와 공유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다만, 노르웨이의 수입은 국가가 보유한 자원에서 발생하지만, 한국의 반도체 호황은 민간기업 이익과 이에 따른 세수 증가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염 교수는 “노르웨이는 유전에서 막대한 수입이 생겼을 때 곧바로 나눠 쓰기보다 장기적으로 적립하는 길을 택했다”라며 “호황기에 늘어난 재원을 미래 세대까지 누릴 수 있는 자산으로 남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정부도 2027년 예산안에서 반도체 호황 등에 따른 추가세수 162조3000억원을 바탕으로 미래대응기금을 신설할 계획이다. 이 가운데 45조4000억원은 청년·성장동력·지방·교육 등에 투자하고 12조5000억원은 국채 신규발행 축소에 활용한다. 나머지 104조4000억원은 여유자금으로 운용한다.
다만 염 교수는 정부가 미래대응기금의 재원 일부를 단기간에 지출하는 방식에 우려를 나타냈다. 반도체 호황이 끝난 뒤에도 지출을 유지할 수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조 교수 역시 반도체 호황에 따른 세수 증가를 항구적인 재정 수입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빅테크의 인공지능(AI) 투자 확대가 현재 반도체 수요를 뒷받침하고 있지만 향후 투자 수익성과 업황 변화에 따라 성장세가 달라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조 교수는 “지금의 반도체 특수를 항구적으로 돈이 들어오는 상황으로 생각해 미리 당겨 쓰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라며 “국가채무를 줄여 이자 부담을 낮추고 반도체 경쟁력을 지킬 연구개발 투자도 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