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영석도 ‘니온’…케이팝 숏폼 강박 깬 에이투오 라이트 [가요 뷰]
입력 2026.10.23 08:26
수정 2026.10.23 08:55
3분 28초 곡에 보컬·화음·아카펠라·고음·댄스 브레이크 꽉 채워 멜론 1위
쉬운 동작 대신 고난도 안무 주문… 타 아이돌 커버·AI 밈으로 자발적 확산
15초 훅에 매몰된 가요계 제작 문법에 던진 경종
짧게 각인되는 후렴과 따라 하기 쉬운 포인트 안무가 케이팝(K-POP)의 흥행을 좌우하는 공식처럼 자리 잡은 가운데 에이투오 라이트(A2O LITE)의 ‘니온’(NEON)이 전혀 다른 방식의 바이럴과 확산을 보여주며 가요계의 고정관념을 깨고 있다. 대중이 쉬운 동작을 따라 하는 수준을 넘어 고난도 군무를 직접 커버하거나 인공지능(AI) 기술로 춤추는 인물을 바꾸고, 타 아티스트의 무대에 음원을 입히는 등 청취자 스스로가 참여 방식을 확장해 나가는 모양새다.
22일 음원 플랫폼 멜론에 따르면 ‘니온’은 이날 오후 4시 기준 TOP100 1위를 기록 중이다. 지난 13일 음원 공개 후 단 29시간 만에 정상을 차지한 데 이어 열흘 가까이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니온’의 가장 큰 특징은 긴 재생시간이다. 3분 28초에 달하는 곡 안에 보컬과 정교한 화음, 아카펠라, 고난도 댄스 브레이크까지 배치해 한 곡 안에서 들려주고 보여주는 재미를 모두 담아냈다.
이는 차트 상위권에 함께 올라온 다른 그룹들의 곡들과 대비된다. 코르티스(CORTIS)의 ‘레드레드’(REDRED)는 2분 43초, 에이티즈(ATEEZ)의 ‘배드’(BAD)는 2분 36초, 아일릿(ILLIT)의 ‘잇츠 미’(It’s Me)는 2분 18초, 키키(KiiiKiii)의 ‘팝 오프 팝 오프’(Pop Off Pop Off) 역시 2분 21초에 불과하다.
AI를 통해 나영석 에그이즈커밍 PD로 만든 ‘니온’ 챌린지. ⓒ채널십오야
이들 곡의 공통된 특징은 짧은 시간 안에 청각을 사로잡는 강력한 반복구다. 최근 케이팝 시장은 숏폼 챌린지 유행에 발맞춰 15초 남짓한 구간에 직관적인 의성어나 동작을 집중 배치하고 바이럴에 유리하도록 전체 곡 길이를 대폭 줄여왔다. 올해 상반기 인기를 끈 투어스(TWS) ‘널 따라가’의 ‘따룸따룸’, 코르티스 ‘영크리에이터크루’(YOUNGCREATERCREW)의 ‘영크크’, 최예나 ‘캐치 캐치’의 ‘따따라따따’ 등도 후렴구의 타격감 있는 발음과 쉬운 포인트 안무를 앞세운 대표적 사례다. 노래를 처음 접하는 사람도 직관적으로 기억하고 따라 하기 쉽다는 점에서 숏폼 이용자를 실제 음원 소비로 연결하는 데 효율적인 방식임은 부정할 수 없다.
업계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국내 제작 현장에서 기획사가 작곡가나 프로듀서에게 챌린지용 후렴 구간을 구체적으로 지목해 만들어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는 아직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케이팝 기획의 중심이 15초 남짓한 숏폼 바이럴 구간 확보에 과도하게 쏠려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후렴 앞뒤의 서사적 전개와 보컬의 다채로운 대비, 무대의 유기적인 변화가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으면 짧은 순간 느껴진 중독성과 한 곡 전체를 오래 다시 듣고 싶은 마음 사이에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반면 ‘니온’ 제작진은 음악 자체를 완성하는 일과 챌린지를 활용하는 일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세웠다. A2O엔터테인먼트 측은 “곡 기획 단계에서부터 특정 구간만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내기보다는 우선 한 곡 전체의 완성도를 극대화하는 데 집중한 뒤 필요에 따라 활용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니온’ 뮤직비디오 속 도입부 댄스 브레이크 파트. AI 기술을 이용해 해당 파트로 만든 챌린지가 유행하고 있다. ⓒA2O엔터테인먼트
미국 프로듀서 뎀 조인트(Dem Jointz)가 작업한 원곡은 이수만 키 프로듀서와 유영진 프로듀서의 정교한 재가공을 거치며 팀의 음악적 강점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완성됐다. 반복되는 후렴 사이에 보컬 레이어를 레이어드하고 브리지에서 곡의 분위기를 완전히 전환한 뒤 후반부 고음으로 긴장감을 높이는 방식이다. 무대에서는 아홉 멤버의 대형 전환과 댄스 브레이크가 음악의 변화를 표현한다. 소속사 측은 “곡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음악과 퍼포먼스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구성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도입부 안무를 제작하는 과정에서도 ‘쉬운 동작’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멤버 아이찡과 시리의 도입부 2인 안무를 제작한 댄서 제이블랙은 지난 16일 공개된 유튜브 채널 ‘스튜디오와글와글’에서 “일반적인 아이돌 작업에서는 안무 난도를 낮춰 달라는 요청을 받곤 하지만 이번에는 시안을 보낸 뒤 오히려 ‘더 고난도로, 제이블랙 본인 스타일을 더 살려 정교하게 만들어달라’는 피드백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처럼 의도적으로 높인 안무의 난도는 실력파 아티스트들이 춤 실력을 드러내는 기회의 장이 됐다. 지난 15일에는 투어스 멤버 지훈과 경민이 고난도의 ‘니온’ 도입부 군무를 커버한 영상을 올려 화제를 모았다. 직접 춤을 추지 않는 대중 역시 영화 ‘올드보이’,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 예능 ‘무한도전’ 등의 장면을 활용한 AI 패러디 밈으로 확장시켰고 케이팝 팬들은 본인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무대 영상에 음원을 덧입히는 자발적 편집물로 반응했다. 여기에 콘텐츠 제작사 에그이즈커밍은 유튜브 ‘채널십오야’를 통해 나영석 PD를 이용한 ‘네온’ AI 챌린지 영상을 공개하며 이러한 유행에 화력을 보탰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헌트릭스 ⓒ넷플릭스
한 가요계 관계자는 “‘니온’은 메인 프로듀서의 안목과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인지시켜준 곡”이라며 “많은 사람들의 추억 속에 머물러 있던 정통 케이팝의 유산과 기획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자기만의 독창적인 정체성을 일관되게 보여주는 팀이 오랜만에 나왔다는 점만으로도 업계 종사자로서 반가운 일”이라고 짚었다.
이처럼 숏폼 트렌드에 맞추기 위해 음악을 단편화하는 주객전도식 기획을 버리더라도 곡 본연의 퀄리티와 완성도가 일정 수준 이상에 다다르면 챌린지 열풍과 대중적 확산은 자연스럽게 뒤따라온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곡의 서사와 표현력을 장시간에 걸쳐 밀도 있게 담아낸 기획이 세계적인 성과를 거둔 사례는 지난해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의 OST ‘골든’(Golden)에서도 증명된 바 있다. 3분 14초 길이의 ‘골든’ 역시 숏폼 맞춤형의 짧고 단조로운 곡이 아니었다. 인물의 갈등을 극대화하는 브리지 구간과 서사를 고조시키는 폭발적인 고음을 꽉 채워 넣은 이 곡은, 작품의 서사와 완결성 높은 음악이 결합했을 때의 파급력을 입증하며 미국 빌보드 핫100 차트에서 8주간 1위라는 대기록을 썼다.
결국 대중이 숏폼 플랫폼을 통해 음악을 접한다는 사실이, 기획되는 음악 자체까지 짧고 단순해져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5초짜리 훅 구간에만 매몰된 게으른 기획을 내려놓고 한 곡 전체의 유기성과 완성도를 회복할 때 청취자들은 그 안에서 오래 간직하고 자발적으로 공유하고 싶은 구간을 발견한다. 케이팝 제작자들이 집중해야 할 것은 숏폼 바이럴을 위한 편법이 아닌, 한 곡 전체를 감동으로 채워낼 음악의 본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