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의 난 1 – 우국충정인가? 반란인가? [정명섭의 실패한 쿠데타 역사㊼]
입력 2026.10.20 14:01
수정 2026.10.20 14:01
진도에 가면 삼별초가 세운 용장산성과 궁궐터가 있다. 제주도에 가면 역시 삼별초가 세운 항파두리 성이 있다. 강화도에서 진도로, 진도에서 다시 탐라라고 불린 제주도까지 이동하면셔 마지막까지 싸운 삼별초는 여러 가지 복잡한 평가를 받는 존재다. 삼별초는 고려의 정규군이 아니라 최씨 집안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사병 집단에서 시작한다. 처음에는 도둑을 잡는 야별초로 시작했다가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눠지고 거기에 몽골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로 조직된 신의군까지 합쳐지면서 삼별초라고 불렸다. 정규군은 아니지만 몽골과의 전쟁이 오래 지속되고 상대적으로 보급과 훈련을 잘 받으면서 일종의 특수부대로서 전쟁에서 활약한다.
그러다가 서기 1258년,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의가 김준과 임연 등에 의해 피살되는 일이 벌어진다. 이 때 동원된 군대가 바로 삼별초였다. 이후에도 삼별초는 임연이 김준을 제거할 때, 그리고 원종이 임준의 아들이 임유무를 제거할 때에도 동원되었다. 정권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강력했던 삼별초의 힘은 역설적으로 평화가 찾아오자 무너지기 시작했다. 몽골과 화친한 고려 조정이 강화도를 떠나 개경으로 돌아가게 되자 삼별초는 위기감을 느낀다. 토사구팽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삼별초로 하여금 자신들이 지키던 고려를 향해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삼별초가 머물렀던 진도 용장산성 터ⓒ정명섭 작가
장군 배중손(裵仲孫)과 지유 노영희(盧永禧) 등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승화후 왕온(王溫)을 협박하여 왕으로 세우고 관부를 설치하였으며......
원종 11년인 서기 1270년 6월, 삼별초들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이전에도 불온한 움직임이 있어서 대신들이 개경으로 환도한다는 결정을 노골적으로 막아서서 원종이 상장군 정자여를 보내서 설득을 시도했다. 하지만 곧장 삼별초를 없애려는 시도를 하면서 결국 조정의 설득을 무시하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바로 며칠 뒤에 강화도의 배들을 모두 끌어모아서 남쪽을 탈출한다. 아마 처음부터 반란을 일으켜서 강화도를 점령한 다음에 최대한 많은 인원과 물자를 끌고 탈출하기로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조정 관리들의 가족들이 인질로 잡혀서 끌려가고 만다. 삼별초가 인질들을 끌고 탈출한다는 소식을 들은 원종은 서둘러 추적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몽골과의 전쟁으로 약체화된 고려군이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잘 무장된 삼별초를 추격하는 건 불가능했다. 목적지인 진도에 무사히 도착한 삼별초는 곧 용장산성을 쌓고 궁궐을 짓는다. 단순히 반란이 아니라 자신들이 진짜 고려 조정이며, 개경에 있는 건 몽골에게 항복한 가짜 조정이라고 선포한다. 그리고 남쪽 지방을 공격하면서 세력을 확대하려고 한다. 이때 삼별초의 기세가 엄청나서 전주와 나주를 지키던 고려의 장수들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김방경이 조금만 늦게 도착했다면 두 곳은 모두 삼별초에게 함락당할 뻔 했다.
이런 삼별초의 움직임에 놀란 고려 조정은 몽골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여몽연합군이 진도로 출병한다. 몽골군 수뇌부에는 필현보와 함께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도망친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양군이 대치한 곳은 훗날 명량 대첩이 벌어진 울돌목이었다. 육지와 진도 사이의 폭이 300미터가 조금 넘는 정도지만 급류가 워낙 강해서 돛과 노로 움직이는 당시의 배로는 제대로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거기다 삼별초군이 배에 이상한 그림을 그려놓고 북과 징을 치면서 기세를 제압하는 바람에 여몽 연합군 역시 쉽사리 진도를 공격하지 못한다. 고려측 지휘관인 김방경이 선두에 서서 공격하다가 오히려 포위 당했다가 구출되는 일도 벌어졌다. 몽골군 지휘관은 겁을 먹고 아예 싸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난감해진 고려와 몽골은 사신을 보내서 회유하려고 했지만 삼별초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시신을 맞이하면서 대화를 하는 척 하다가 기습적으로 고려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고려 사신이 내민 국서는 정중하게 받았지만 몽골의 황제가 보낸 국서에 대해서는 받지 않는 등의 갈라치기 공격도 시전했다. 삼별초의 활동인 다음해인 서기 1271년까지 이어졌는데 오히려 더 활발해졌다. 특히, 3월에는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인 합포현을 공격해서 건조 중인 배들을 불태웠다. 이 배들은 몽골의 쿠빌라이 칸의 명령으로 일본원정을 위해 만들어지고 있던 배였다. 그리고 일본에도 서찰을 보내서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삼별초의 이런 활동은 고려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도 했다. 개경의 관노인 숭경과 공덕이 무리를 모아서 몽골의 감독관인 다루가치와 고려의 관리들을 죽이고 진도로 도주하려다가 발각되는 일이 벌어졌다. 지금의 밀양인 밀성군에서도 백성들이 봉기해서 삼별초군을 맞이하려다가 들키기도 했다. 하지만 삼별초의 이런 기세는 서기 1271년 5월, 김방경과 홍다구가 이끄는 여몽 연합군이 마침내 진도에 상륙하는데 성공하면서 꺽이고 만다. 배중손은 생사가 불명확한데 연구자들은 남도석성으로 퇴각했다가 그곳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살아남은 삼별초는 배를 타고 더 멀리 남쪽으로 내려간다. 삼별초의 반란 시즌 1이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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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섭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