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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은 한국, 창작은 영미권…K뮤지컬 글로벌 진출의 ‘빈자리’ [메이드 바이 코리아③]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6.10.15 06:59
수정 2026.10.15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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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권 직행 4개 신작 모두 대본·음악·연출 현지 인력이 전담

언어 뉘앙스와 매일 수정되는 디벨롭먼트 속도 등 현실적 장벽 작용

정부 지원도 '창작자 글로벌 육성'으로 선회… 단계적 현지화 경험 축적 절실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의 극본은 케이트 케리건, 작곡은 제이슨 하울랜드, 작사는 네이선 타이슨, 연출은 마크 브루니가 맡았다. 11월 런던에서 트라이아웃을 시작하는 ‘네로’는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극작가 스티븐 세이터와 작곡가 덩컨 셰이크가 쓰고, 영국 연출가 린지 포스너가 연출한다. 9월 런던에서 개막한 ‘프란츠앤마리’는 영국 밴드 싱잉 로인스의 크리스 브로더릭·롭 셰퍼드가 만든 음악을 테레사 하워드가 각색하고 마이클 오클리가 연출했다. 내년 3월 미국에서 트라이아웃을 여는 ‘어거스트러쉬’는 닉 블레마이어가 극본과 작곡을 맡았으며, 톰 킷과 반 휴즈가 작곡에 가세했다. 연출은 캐슬린 마셜이 맡는다.


네 작품은 모두 한국 제작사가 만들었다. ‘위대한 개츠비’와 ‘어거스트러쉬’는 오디컴퍼니, ‘네로’는 신시컴퍼니, ‘프란츠앤마리’는 에이콤의 작품이다. 한국 제작사가 리드 프로듀서로 영미권 현지 제작을 이끌고 자본을 대고 있지만, 대본과 음악, 연출에 한국 창작자의 이름은 없다.


영국 무대에 오르는 '프란츠앤마리'의 뿌리가 된 뮤지컬 '보이첵'(2014) ⓒ에이콤

브로드웨이에서 대본과 음악의 저작권은 일반적으로 작가에게 남고, 작가는 공연 수익에 따라 로열티를 받는다. 즉, 한국 뮤지컬 자본이 해외로 뻗어나가 프로덕션을 장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작품의 바탕인 대본과 음악의 저작권, 그리고 창작자로서의 이력은 현지 창작진에게 쌓인다.


물론 한국 창작진의 역량이 영미권에 진출한 사례가 없는 건 아니다. 박천휴 작가와 미국 작곡가 윌 애런슨이 만든 ‘어쩌면 해피엔딩’, 천세은 작가와 최종윤 작곡가의 ‘마리 퀴리’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국내에서 먼저 완성도를 검증받은 뒤, 현지 제작자나 소규모 극장을 거쳐 스텝업한 사례다. 반면 한국 제작사가 큰 자본을 들여 영미권에서 직접 개발하는 프로젝트의 메인 창작진으로 한국 창작자가 발탁된 사례는 전무하다.


국내 대형 제작사들이 주도하는 프로젝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창작진 기용을 현실적으로 주저하는 가장 큰 장벽은 ‘현지 언어의 결’과 ‘살인적인 개발 시스템 속도’다.


영미권의 뮤지컬 디벨롭먼트(작품 개발) 과정은 극작, 작곡, 연출이 한곳에 합숙하듯 모여 매일같이 대본과 악보를 뜯어고치고 다음 날 배우들과 시연하는 혹독한 과정의 연속이다. 박명성 신시컴퍼니 예술감독은 11월 런던에서 트라이아웃을 앞둔 ‘네로’를 언급하며 “대본과 음악이 매일 바뀌는 단계”라고 말했다.


그는 “영어로 쓰인 대사와 가사는 단순히 문법적으로 완벽하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현지 관객이 생활에서 공감할 수 있는 뉘앙스인지, 배우가 무대 위 호흡으로 자연스럽게 뱉어낼 수 있는지를 즉각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몇 차례의 오프라인 만남과 온라인 회의만 가지고 감당하기에는 사실 현실적인 장벽이 있다”고 토로했다. 원어민 관객의 정서와 영미권 특유의 계약·작업 시스템을 현지에서 수년간 온몸으로 부딪치며 체화한 창작진이 중심에 설 수밖에 없다는 현실론이다.


그럼에도 장기적인 시야에서는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박 감독은 “이번 창작진을 꾸리며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크리에이티브까지 포함해 여러 가능성을 검토했다”며 “한국 창작자가 참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 한국 창작자들이 이런 프로젝트의 중심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 역시 ‘단계적 체화’를 뼈대로 한 해법을 제시했다. 신 대표는 “한국의 창작자들이 작품의 디벨롭먼트 과정(리딩, 워크숍, 트라이아웃 등)에 직접 참여하며 현지 시스템의 문법을 체화하는 경험이 필요하다”며 “개인 역량 강화를 넘어 현장 경험이 풍부한 국내외 프로듀서들과 호흡할 수 있는 접점이 필요하고, 리딩 공연처럼 양국 프로듀서가 직접 교류하고 작품을 검증할 수 있는 자리를 꾸준히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예술경영지원센터(예경)도 이러한 맹점을 파악하고 지원의 무게중심을 창작자 육성으로 옮기고 있다. 서유미 예경 공연예술본부 팀장은 “2025년까지는 현지화 전략을 갖춘 완성작 중심의 해외 진출에 집중했다면, ‘어쩌면 해피엔딩’ 등의 해외 성과를 계기로 글로벌 역량을 갖춘 한국 창작자 육성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됐다”고 밝혔다.


예경이 올해 신설한 사업은 신진 작가·작곡가·연출가 대상 ‘뮤지컬 창작진 글로벌 아카데미’, 한국 창작자가 영미권 창작진과 협업하는 ‘창작진 글로벌 역량강화’, 가사 번역과 현지 피칭을 돕는 ‘영미권 발표지원(피칭·번역)’ 등 세 가지다. 특히 글로벌 아카데미는 24명의 신진 창작자를 선발해 8월부터 12월까지 약 4개월간 공동 워크숍, 공개특강, 팀별 멘토링, 브로드웨이·웨스트엔드 창작진 특강을 거쳐 영문 피칭덱을 만들고 쇼케이스를 준비한다.


2026 뮤지컬 창작진 글로벌 아카데미 1차 공개 특강 ⓒ예술경영지원센터

서 팀장은 “K-뮤지컬의 지속 가능한 해외 진출을 위해서는 한국 창작자 본연의 글로벌 경쟁력 확보가 필수적”이라며 “해외 시장에 대한 이해와 현지화 역량을 갖춘 창작자가 배출될 때 우리 IP의 독창성을 유지하면서도 글로벌 시장에 안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 사업은 단기간에 작품을 내기보다 창작자의 장기적인 역량 강화를 목표로 한다. 예경은 첫 사업이 끝나는 대로 참여 창작자의 사후 관리와 쇼케이스 결과물의 심화·발전 방안을 논의하고, 내년에도 올해와 비슷한 규모로 운영할 계획이다. 12월 쇼케이스 이후 실제 제작으로 이어지는지 확인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창작진의 진출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돌파구를 연 것은 무대 위 배우였다. 지난 8월, 뮤지컬 배우 아이비가 브로드웨이 앰버서더 극장에서 뮤지컬 ’시카고‘의 주인공 록시 하트 역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치른 것이다.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연기하고 노래해야 하는 혹독한 언어 장벽을 배우 스스로의 실력으로 돌파하며 공연 막바지 전석 매진과 입석 판매라는 쾌거를 거뒀다.


박명성 감독은 이 사건이 갖는 나비효과에 주목했다. 그는 “배우가 무대에서 역량을 증명하면 현지 제작사는 한국 배우 기용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고, 한국 프로덕션이 현지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면 자연스럽게 한국 창작자가 들어설 공간이 열리게 된다”며 “런던에서 진행되는 ‘네로’의 오디션 현장에도 실력 있는 한국 배우들이 찾아와 언어 장벽을 넘는 열연을 보여주길 고대한다”고 말했다.


해외 진출을 통해 산업의 체급을 키워야 한다는 데는 민관의 이견이 없다. 신 대표는 “(해외 진출은) 한국 뮤지컬 산업 전체의 체급을 키우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다음 단계”라고 했다. 그는 “과거에는 브로드웨이 무대를 밟았다는 도전 자체에 의미를 두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 필요한 것은 글로벌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오래 숨 쉬는 작품을 증명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1세대 제작사들이 자본과 기획력으로 영미권 무대에 진입했다면, 다음 과제는 그 무대에 한국 창작자의 대본과 음악을 안착시키는 일이다. 이것이 한국 제작사가 주도하는 해외 진출이 풀어야 할 핵심 과제다.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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