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카카오톡
블로그
페이스북
X
주소복사

역사와 문화 사이…2030 한일 콘텐츠 교류, 옅여진 경계에도 선은 분명 [Now 2.30]

박상준 기자 (psj96@dailian.co.kr)
입력 2026.10.12 05:04
수정 2026.10.13 18:23
G 구글 검색 선호 출처로 추가 ↗

日 콘텐츠 즐기는 2030, 대일 호감도 최고…게임·음악 등 경계 허물어

"문화는 즐겨도 역사 문제는 풀어야"…역사문제 인식은 여전

해당 이미지는 AI로 제작됨.

'일반인 코스프레'. 마이너한 분야에 푹 빠져 있으면서도 남들 앞에서는 그런 취미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신조어다.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 등 소위 '오타쿠 문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익숙한 말이다. 좋아하는 작품의 대사를 줄줄 외우고 캐릭터 상품을 모으면서도, 밖에서는 제목조차 처음 듣는 척한다. 취향 하나 즐기는 데도 정체를 숨기는 기술이 필요했던 셈이다.


이런 말이 통용된 데는 취향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있었다. 일본 문화에 깊이 빠진 사람을 오타쿠라 부르며 유별나게 보거나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과거부터 뿌리 깊었던 편견이다.


식민지배의 기억과 풀리지 않은 과거사에서 비롯한 대일 반감, 일본 대중문화의 유입을 제한하던 시절부터 이어진 '왜색'에 대한 경계심까지 더해졌다. 문화와 콘텐츠를 좋아하는 마음이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맹목적 지지로 읽히기도 했다. 그저 재미있어서 본다는 말만으로는 설명이 끝나지 않으니, 취향을 감추는 편이 편했던 것이다. 불과 6년 전까지 한창이었던 '노 재팬' 운동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같은 시기 바다 건너에서도 취향을 숨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혐한 분위기가 거셌던 2010년대의 일본이다. 지금도 현지 K팝 팬들은 한국 문화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일본의 배신자로 몰릴까 봐 팬이라는 사실을 감춰야 했다고 회고한다. 이쪽에서는 일본 만화를, 저쪽에서는 한국 가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눈치를 본 것이다.


2020년대에 들어선 상황이 조금 달라지고 있다. 양국의 정치·외교 관계와는 별개의 기준으로 서로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청년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취향을 숨기는 대신 좋아하는 것을 찾아 바다를 건넌다. 한국 청년은 일본 만화의 굿즈를 사러 도쿄를 찾고, 일본 게이머는 한국 웹툰을 원작으로 한 게임이 출시되기만을 기다린다.


다만 양국 청년들의 역사 인식이 희미해졌다거나 한일 갈등이 완전히 해소됐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사와 외교 현안에 대한 판단은 그대로 두면서도 여행과 콘텐츠는 취향과 재미의 영역에서 선택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 애니메이션 최초로 국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애니플러스


게임·음악·영화 오간다…서로의 콘텐츠 즐기는 한일

지난달 17일부터 일본 치바현 마쿠하리 멧세에서 열린 도쿄게임쇼(TGS)의 가장 큰 특징은 한국과 일본 콘텐츠를 예전처럼 선명하게 나누기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20일까지 나흘간 돌아본 전시장 곳곳은 그간 한일 대중들의 콘텐츠 소비 방식의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줬다.


특히 넷마블 부스에서는 '나 혼자만 레벨업: 카르마(나혼렙 카르마)'를 플레이하거나 전시물을 촬영하는 일본 관람객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나혼렙 카르마는 한국의 유명 웹소설 '나 혼자만 레벨업(나혼렙)'을 원작으로 하는 로그라이크 액션 롤플레잉(RPG) 게임이다. 나혼렙은 웹툰 및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는데, 일본 현지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나혼렙 카르마를 체험하기 위해 TGS를 찾았다는 한 현지 관람객은 "원래부터 '나만 레벨업인 건(나혼렙의 일본 이름)' 웹툰과 애니메이션을 전부 봤다"며 "직접 미즈시노 슌(주인공 성진우)을 조종해보니 너무 재미있다. 게임이 빨리 출시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TGS 2026 관람객들이 나혼렙 카르마 시연 대기를 위해 길게 줄 서 있다.ⓒ넷마블

반대 사례도 많았다. 엔씨 '아스트라에 오라티오', 넥슨게임즈 '파레이돌리아', 스마일게이트 '미래시: 보이지 않는 미래' 등 이번 TGS에 나온 한국 신작 상당수는 '서브컬처' 장르로 개발 중이다.


파레이돌리아 시연을 최우선 목표로 TGS에 방문했다는 한국인 관람객 김정우(24) 씨는 “군 복무 중에 넥슨게임즈의 전작 블루아카이브를 정말 열심히 플레이했다”면서 “블루아카이브에서 묘사된 일본 특유의 차분한 감성을 좋아했는데, 후속작인 파레이돌리아도 직접 해보니 딱 취향에 맞는 분위기로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얼른 출시됐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서브컬처 게임은 통상 일본 애니메이션풍 비주얼과 캐릭터 수집, 이용자와 캐릭터 간 관계 형성 등 '오타쿠 감성'을 주로 다룬다. 국내에서도 오타쿠 문화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관련 게임의 흥행 사례가 늘면서 대형 게임사들이 잇따라 신작을 내놓고 있는 추세다. 이들은 오타쿠 감성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일본에서 신작 반응을 확인했다.


일본 지식재산권(IP)을 한국 회사가 게임으로 만들고 한국 웹툰을 원작으로 한 게임을 일본 이용자가 즐긴다. 일본에서 익숙한 장르 문법을 활용해 한국 개발사가 만든 신작을 다시 일본 관람객이 기다린다. 제작국과 소비국을 한 방향으로 나누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게임 밖으로 눈을 돌리면 이런 모습은 더 분명해진다.


지난달 19~20일에는 국내 대형 공연장이 일본 음악을 듣기 위해 모인 관객으로 채워졌다. 일본 싱어송라이터 바운디(Vaundy)는 인천 인스파이어 아레나에서 아시아 아레나 투어 'HORO' 서울 공연을 열었다. 두 공연 모두 매진됐다.


콘서트 양일 모두 티켓팅에 성공했다는 이은아(29) 씨는 "바운디와 요루시카 노래를 제일 좋아한다"며 "J팝 특유의 감성이 취향에 맞아 평소에도 자주 듣는다. 마무리 곡으로 '무희'를 불러줘서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일본 유명 가수 바운디가 9월 19일과 20일 인천 인스파이어 아레나에서 이틀간 3만명을 동원했다.ⓒHiyoshi "JP" Junpei

음악 스트리밍 시장에서도 변화가 확인된다. 빌보드 재팬이 음악 데이터 분석업체 루미네이트 자료를 토대로 집계한 결과 한국 내 전체 음악 스트리밍에서 일본 곡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5년 6.11%에서 올해 상반기 7.35%로 올라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애니메이션 타이업 음악의 인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백 넘버, 요아소비, 후지이 카제, 요네즈 겐시, 바운디 등 개별 아티스트를 찾아 듣는 소비도 확대되고 있다.


반대로 2025년 상반기 일본 내 해외 아티스트 스트리밍에서 한국 아티스트가 차지한 비중은 29%로 미국(38%)에 이어 두 번째였다. 가장 많이 재생된 해외 아티스트는 트와이스와 방탄소년단이었고, 상위 10팀 중 브루노 마스를 제외한 9팀이 K팝 아티스트였다. 음반뿐 아니라 일본 공연장과 방송, 광고에서 한국 아티스트를 만나는 일도 익숙해졌다.


웹툰과 캐릭터 역시 서로의 시장을 오간다. 한국 웹툰이 일본에서 애니메이션과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한국 캐릭터 IP가 굿즈와 오프라인 행사로 확장된다. 반대로 한국에서는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 IP가 게임과 상품, 극장판으로 다시 소비된다. 나혼렙과 '귀멸의 칼날'은 서로의 시장으로 수출돼 훙행한 사례다.


어느 한쪽의 문화를 다른 쪽이 받아들이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콘텐츠가 상대국에서 다시 작품과 상품으로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2030이 바라보는 한일관계…역사와 문화 사이 달라진 거리

문화적 친밀감이 커지는 가운데 서로를 바라보는 인식에도 호의가 담기고 있다.


동아시아연구원(EAI)과 일본국제문화회관(IHJ)이 올해 실시한 한일 국민 상호인식조사에서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호감도는 54.3%로 2013년 조사 시작 이후 가장 높았다. 지난해 52.4%보다 1.9%포인트 상승했다.


일본인의 한국 호감도도 지난해 24.8%에서 올해 35.3%로 10.5%포인트 올랐다. 부정적인 인상은 51.0%에서 44.1%로 6.9%포인트 낮아졌다.


그렇다고 일본 문화에 대한 호감이 양국 사이에 쌓인 역사적 갈등까지 덮어주는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에 대한 책임·배상 문제는 여전히 해결 과제로 남아 있다. 특히 지금의 2030세대는 성장 과정에서 '노재팬' 불매운동을 지켜보기도 했는데, 이 역시 강제동원 문제가 국가간 무역과 소비 전쟁으로 번진 사례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식민지배의 역사를 축소·왜곡하는 교과서 서술도 꾸준히 갈등을 불러왔다.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방위상이 8월 15일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에서 참배하고 있다. ⓒAP/뉴시스

일본 만화를 보고 노래를 즐긴다는 이유로 2030세대가 이런 문제에 무관심하다고 볼 수는 없는 이유다. 오히려 문화는 문화대로 즐기면서도, 역사적 책임은 별개로 묻고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난해 EAI에 기고한 이슈브리핑 '20·30세대가 견인하는 한일관계의 미래'에서 "일본에 대한 높은 호감도를 보이는 젊은 세대가 자칫 역사 문제에 대해 소홀히 하는 것처럼 볼 수 있지만, 이 세대의 역사문제에 대한 인식은 기성 세대 못지 않다"고 분석했다. 역사문제에 대한 민감도가 기성세대보다 낮을 수는 있지만, 사안의 심각성과 문제 해결의 필요성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설명이다.


보고서에 제시된 2025년 EAI 조사 그래프를 보면, 한일관계가 지향해야 할 목표로 18~29세와 30대는 각각 약 59%가 '양국 간 역사문제 해결'을 선택했다. 2개 항목을 선택하는 복수응답에서 두 연령대 모두 가장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


한일 교류 발전을 위해 우선 필요한 조치에서도 '역사인식의 차이를 줄이기 위한 민간대화 활성화'를 선택한 비율이 18~29세 약 36%, 30대 약 45%로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청년세대 교류 확대'를 선택한 비율도 각각 약 35%, 약 29%로 나타났다.


해당 이미지는 AI로 제작됨.

TGS 기간 도쿄 아키하바라에서 만난 한국인 청년 하근홍(25)씨는 "일 년에 두 번씩은 '헌터X헌터(일본 인기 만화)' 때문에 일본에 온다. 수시로 굿즈를 사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양국의 역사·문화적 관계에 대한 인식을 묻자 "한일 양국이 명백히 풀어야 할 숙제가 있고, 일본으로부터 받아내야 할 것들도 있다"며 "그렇지만 문화적으로 교류가 이뤄지고, 우호적인 분위기를 형성한 상황에서도 과거사는 충분히 논의할 수 있는 문제라 생각한다. 오히려 무조건적 배척은 서로에 대한 악감정만 키울 것"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이처럼 역사는 해결해야 할 문제로 남겨두면서도, 오늘 무엇을 보고 듣고 즐길지는 별개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오늘날 2030의 한일 문화 소비 양상에서 나타나는 셈이다.

박상준 기자 (psj96@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댓글 0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