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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보러 들렀다 꺼낸 공연 사진…80세의 외출은 계속된다 [급변하는 도시 속 노인의 낭만②]

전지원 기자 (jiwonline@dailian.co.kr)
입력 2026.10.09 10:29
수정 2026.10.09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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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지색 양복에 중절모 차림의 80세 노인이 써내려가는 '취향의 지도'

지하철 타고 수도권 각지로…무대 보고 옛 영화 고르는 노년들

장애인자료실·전자신문대 갖춘 도서관, 공연장 사이 휴식과 교류의 거점

베이지색 톤으로 깔끔하게 차려입은 양복 상의, 머리에 얹은 클래식한 중절모. 지난 1일 서울 중구 서울도서관에서 만난 최영수(가명, 80·서울 구로구)씨는 정갈하게 갖춰 입은 모습으로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여든의 나이, 그에게 서울과 수도권 도심 전체는 매일 새로운 취미를 찾아 나서는 거대한 무대이자 놀이터다.


"잠깐 신문도 좀 보고, 다리도 쉴 겸 들어왔어요."


도서관을 찾은 이유를 묻자 최씨가 덤덤하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평소 어떤 여가를 즐기느냐는 질문이 던져지자 그의 눈빛이 이내 활기를 띠었다. 주머니에서 꺼내든 휴대전화 화면에는 알록달록한 조명 아래 펼쳐진 트로트 가수의 화려한 무대 사진과 영상들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최씨의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과 메시지함. 지역별 공연장과 실버 무대에서 보낸 일정 안내 문자로 차 있었다. ⓒ데일리안 전지원 기자

화면 속에는 강진 등 유명한 가수의 열창과 그에 환호하는 관객들의 열기가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의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과 메시지함 역시 지역별 공연장과 실버 무대에서 날아온 '알림톡'과 일정 안내 문자로 가득 차 있었다.


최씨의 하루는 이 알림톡들을 확인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출연진과 장소, 시간을 따져보고 마음이 끌리는 무대가 정해지면 주저 없이 문을 나선다. 서울 종로의 실버영화관은 물론, 인천 주안 일대의 공연장까지 그가 발을 넓히는 공간에는 한계가 없다.


"지하철이 공짜니까 그걸 타고 여기저기 다 다니는 거죠. 친구들이랑 같이 가서 노래 듣고, 신나게 박수 치고, 나와서 밥 한 끼 먹고 어울리는 게 제일 큰 낙이에요."


서울도서관 내 전자신문 스크린 화면을 보고 있는 노인. ⓒ데일리안 전지원 기자

그에게 지하철은 그저 갈 곳이 없어 시간을 때우기 위해 타는 수단이 아니었다. 보고 싶은 무대, 만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달하기 위한 명확한 목적이 있는 교통수단이었다.


공연장에서 한껏 열기를 즐긴 뒤 찾아오는 도서관은 그에게 또 다른 휴식과 배움의 공간이다. 이날 그가 머물던 서울도서관 1층 장애인자료실과 복도 풍경도 분주했다. 독서확대기 화면 앞에 바짝 다가가 고개를 숙인 채 책장을 넘기는 노인(국가데이터처의 '고령자 통계'는 65세 이상을 기준으로 고령인구를 구분한다. 이 기획에서는 이들을 '노인'으로 지칭한다.)들로 좌석이 빈틈없이 차 있었고 전자신문 스크린 앞에서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기며 오늘의 뉴스 헤드라인을 읽어내려가는 손길이 바빴다.


서울도서관 장애인자료실은 노인과 장애인을 위해 독서확대기, 휴대용 확대기, 음성 변환 기기 등 대체자료와 보조기기를 제공하는 곳이다. 도서관 안에서 이들의 시간은 그저 정적인 독서에만 갇혀 있지 않았다. 누군가는 눈을 맞춰 글을 읽고 A씨처럼 잠시 숨을 돌리며 신문을 넘기는 등 저마다의 속도로 시간을 누리고 있었다.


실버영화관 매표소에 노인들이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데일리안 전지원 기자

이처럼 노년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능동적인 문화 지도는 도심 곳곳에서 확인된다. 앞서 찾은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4층 실버영화관 현장도 관객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이곳은 60세 이상 노년층을 대상으로 단돈 2000원에 '미워도 다시 한번', '벤허' 같은 추억의 옛날 영화를 상영하는 국내 최초의 실버 전용 극장이다.


평소 영화를 보러 찾던 영화관은 매주 월요일 오후 1시 30분이 되면 전혀 다른 열기로 가득 차오른다. 영화 상영 대신 노인들을 위한 트로트 무대와 특별 공연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여러 가수가 무대에 올라 흥을 돋우는데, 인지도가 높은 가수 한 명만 라인업에 올라도 매표소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나고 표를 구하지 못해 발길을 돌리는 일이 허다할 정도다. 현장의 뜨거운 열기는 노인들이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문화공간과 콘텐츠에 얼마나 강한 수요를 품고 있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지난달 21일 추석을 앞두고 찾은 공연에서는 가수 이아신이 무대에 올라 관객들에게 큰절을 올리며 "박수 치신 분들은 200살까지, 안 치신 분들은 199살까지 건강하시라"는 입담을 건네자 객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객석 뒤편에서는 박자에 맞춰 신나게 몸을 흔드는 관객도 눈에 띄었다. 이날 공연에는 방송인 전원주가 무대 위에 올랐는데, 그가 '안동역에서' 같은 정겨운 가락을 부르면 관객들은 가사를 목청껏 따라 부르고 손짓을 주고받으며 공연의 주체로 호흡했다.


실버영화관에서 진행된 전원주의 무대. ⓒ데일리안 전지원 기자

이곳을 찾은 김학경(69·서울 동대문구)씨 역시 산책 겸 한 달에 한 번은 꼭 종로를 찾는다. 김씨는 "다른 영화관은 너무 비싸서 엄두도 못 내는데 여기선 단돈 2000원에 옛날 명작 영화를 볼 수 있어 자주 온다"며 "복지관 프로그램도 찾아다니고 제 형편과 취향에 맞춰 다니면 할 수 있는 문화생활은 찾아보면 다 있다"고 웃어 보였다.


정해진 시설에 수동적으로 수용되기보다 자신의 비용과 선호에 맞춰 프로그램을 '선택'하는 주체적인 소비자의 모습이다. 주거지 인근 공원의 야외 장기판이나 복지관의 문화 강좌 역시 이러한 노년층의 자발적 여가 지형도를 구성하는 중요한 한 축이다.


통계 지표도 이를 뒷받침한다.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2026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노인 중 지난해 1년간 단체 활동에 참여한 비율은 64.1%에 달했다. 이 중 친목·사교단체(78.0%), 취미·스포츠·여가 단체(42.0%) 활동 등 사회적 교류와 취향에 기반한 활동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서울도서관 앞에서 만난 최영수(가명)씨 ⓒ데일리안 전지원 기자

최씨는 예전 서울광장에서 즐기던 다채로운 야외 공연들과 인천 부평에서 찾곤 했던 정겨운 무대들에 대한 기억을 또렷이 품고 있었다. 과거의 아련한 추억과 경험은 그가 오늘도 어디로 외출할지 결정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된다.


인터뷰 끝자락, 베이지색 양복을 가볍게 추스른 최씨는 소박하지만 울림이 깊은 바람 한마디를 남겼다.


"나쁜 말은 하지 말고, 서로 몸 건강하게 지내는 게 최고지. 그저 친구들이랑 같이 모여서 노래 듣고, 박수 치고 응원할 수 있는 자리가 도시 곳곳에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휴대전화 갤러리에 가득 찬 화려한 무대 사진과 손때 묻은 알림톡은 80세 노인의 일상이 더 이상 집이나 단조로운 돌봄 시설 안에만 갇혀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베이지색 양복과 중절모를 고쳐 쓴 최씨는 오늘도 자신만의 취향과 낭만이 서린 도심의 무대를 향해 묵묵히, 그러나 활기차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전지원 기자 (jiwonline@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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