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아버지, 세계 관광객을 맞이하다
입력 2009.08.08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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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등재 기념 조선왕릉을 찾아서②-건원릉>
죽어서도 누구도 근접 못하는 위엄…600년전의 억새풀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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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교를 넘어서 능역을 바라 보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작은 도시 구리시에 조선이 들어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후 조선을 만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동구릉을 찾는다. 경기도와 서울, 대구, 부산에서도 조선의 조상을 참배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다.
저 멀리 프랑스에서도 일가족이 방문했다. 정보를 통하여 알게 된 곳을 방문했다고 한다. 세계문화유산의 명성과 위력을 실감나게 한다.
왕릉 40기 중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600여년의 세월동안 영면해 계신 건원릉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동구릉으로 불러 모으고 있다.
조선의 왕들이 선왕의 죽음을 슬퍼하며, 조상을 만나기 위해 풍악을 울리며 다녔던 옛길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동구릉은 그대로 이다. 입구를 지나기만 하면 자연을 그대로 살리며 단장된 왕릉의 숲이 주는 호젓함이 빠진다.
신(축문을 든 대축)은 소맷 돌에 구름문양을 펼친 신계를 오르고 자손인 왕은 동계를 올라 구름위의 세계 정자각에 들어선다.(사진 왼쪽),조상이 자손을 만나기 위해 넘나드는 다리 신교.(사진
홍살문을 지나 재실을 곁에 두고 지나려면 동구릉을 가로지르는 물줄기에 어린 꼬마들이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해맑은 미소를 보내고 있다. 두 눈 가득 사랑을 담은 부모의 눈도 아이들을 향하고 있다.
세상과 아들이 보기 싫어 함흥으로 떠난 아버지 태조에게 문안인사를 보낸 차사가 돌아오지 않는다 하여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연려실기술 燃藜室記述〉 등에 수록된 야사에서 태조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소와 송아지를 매개로한 박순(朴淳)의 방법이었다고 한다. 부자지간의 정을 무엇으로 끊을 수 있을까? 어버이와 자식은 어쩔 수 없는 한 묶음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왕위 호위하는 석양, 석호가 능침을 엄호하고 있다.
아버지 태조를 뵈려 발길을 옮겼을 태종을 생각하며 건원릉으로 향한다.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위해 세운 개경사 터에는 아무런 표지석도 없이 그저 무성한 숲으로 남아 있다. 수릉과 현릉을 돌아서 가면 동에서 서로 흐르는 작은 개울을 넘는 내를 건너지 말라는 금천교(禁川橋)를 만난다.
1408년 5월 24일 창덕궁 별전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정리한 태조가 아들 태종에 의해 장지를 양주 검암산 자락에 정하게 된다. 아버지가 남긴 유언으로 고향땅 함흥에서 공수해온 억새풀로 봉분을 덮어 드리면서 회한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왕권을 위해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겪어야 했던 부자의 막상막하 고집은 역사서에서 많이 다루고 있다.
마모된 병풍석, 와첨석, 난간석 등, 억새 봉분에 야생화가 피었다.
명나라 사신 기보가 건원릉을 참배했는데 “어찌 이와 같은 천작(天作)의 땅이 있는가? 반드시 〈인위적으로〉 만든 산일 것이다”라고 능침의 산세를 보고 감탄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과연 우뚝 선 모습이 감히 누구도 근접하기 어려운 위엄이 서려 있다. 혹자는 건원릉의 풍수가 조선을 500년 역사로 이끈 원동력이라고 한다.
멀리서 바라보아도 봉분의 억새풀은 다른 왕릉의 봉분들과 다르다. 높은 사초지 위에 한들한들 흔들리는 억새풀은 가을이오면 하얀 억새꽃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600여 년 전에 심은 억새가 나고 자라 지금까지 어어지고 있다니 세월의 무상함의 전율이 전신을 타고 돈다.
축문을 소전대에서 태우기 위해 대축이 내려오는 서계와 소전대와 능상
간혹 참배객들은 관리소장의 관리 소홀을 꾸짖기도 하는 해프닝이 벌어진다. 욕을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고 했던 속담이 머릿속을 맴돌며 전직 소장님들의 모습이 스쳐지나간다.
건원릉은 매년 4월 한식날에 작년의 억새를 제거하고 깔끔하게 정리한다. 억새의 뿌리는 잘못 건드리면 죽어 버려 건원릉의 봉분은 더욱 조심스럽다고 한다.
태조의 능은 시대의 건축가 박자청에 의해 조성된다. 조선한양의 주요건축물을 건축한 박자청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태조의 능이 조선 최고(最古)의 왕릉이 됐다.
병풍석의 조각과 수법은 예술적이며 한 치의 오차도 없다. 빗물이 스미지 않도록 화강석을 두껍게 저며서 만든 와첨석(瓦檐石)의 모습은 한옥 지붕의 암·수기와가 서로 틈을 맞추어 한 방울의 물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돌아가신 왕을 위한 건축가의 마음도 그러했다.
정자각에서 본 홍살문과 참도, 양옆의 잔디밭
병풍석에 펼쳐 놓은 열두 방향의 십이지신상, 모서리 기둥 우주에 펼쳐놓은 영저, 영탁, 한 잎 한 잎 정성 드린 연꽃잎인 앙련과 복련의 모습들이 시대의 최고 작가들의 향연을 보는 것 같다. 아쉽게도 육백년의 세월 속에 온전히 남아 있지 않고 많이도 상했다.
왕릉은 크게 세 영역으로 구분된다. 살아 있는 자손이 제사를 드리기 위한 공간으로 금천교를 지나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공간이다.
뒤에서 본 건원릉
정자각은 조상과 제사를 올리는 자손과의 공동 구역이다. 정자각을 넘어 신교 이후는 당연히 조상의 성역에 속한다. 그중 능침은 능역의 주인인 돌아가신 왕의 침소이다. 자손(헌관)이 왕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차를 마시고 할 수 있는 곳은 정자각이다. 참배객인 우리에게 크게 양보하여 가장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곳도 정자각까지 이다.
조선 왕릉은 형태뿐만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정신적 사고와 가치도 함께 세계유산인 것이다. 그곳을 방문한다는 것은 그 시대 분들이 만든 업적과 생각을 회고하고 배운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답사객의 무리한 행보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병풍석, 우주에 조각된 영저, 영탁(사진 왼쪽), 십이지신상을 조각한 병풍석
조선을 건국한 왕 태조가 잠들어 계신 건원릉은 가장 많은 참배객을 맞이하는 곳이다. 고려의 무장으로 조선의 왕으로 사랑하는 신덕왕후의 남편으로 자랑스런 아들들의 아버지로 살았던, 그러 했기에 평안한 삶이 아니었던 그가 저 높은 곳에 600여년을 죽어서 살아 있다. 정릉의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길 원했지만 홀로 안장된 태조의 옆구리가 시릴 것 같다.
이제 조선의 왕에서 세계 속의 어버이로 도약한 그의 곁에 해설사로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데일리안 경기=오일순 객원기자]
동구릉의 맑은 개울물에 어린이들이 발 담그고 놀고 있다.
정자각에서 본 건원릉, 억새풀이 무성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