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회장이 이렇게 대국민 사과를 한다면
입력 2026.05.21 11:00
수정 2026.05.21 11:00
향후 삼성전자 노사 대립 심각해질 가능성 존재
성과급 갈등이 다른 업종으로 확대될 위험성 높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무노조 경영' 정신은 살려야
20일 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경기고용노동청에서 열린 삼성전자 임금협상을 마친 후 여명구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반도체 사업 담당) 피플팀장(왼쪽)과 최승호 삼성그룹 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지부 위원장(오른족)이 잠정 합의안에 서명한 후 김영환 고용노동부 장관과 손을 맞잡고 있다. ⓒ연합뉴스
삼성전자 노사가 5월20일 밤 극적으로 합의하면서 한 기업의 위기가 국가의 재앙으로 번질 뻔한 총파업을 일단 피했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것은 앞으로다. 당장 22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되는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합의안이 부결되면 파업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
무엇보다 사측과 노측의 갈등은 깊어졌고 향후 여러 이슈를 놓고 대립할 위험성이 높아졌다. 지금이야 회사가 반도체 슈퍼사이클에 올라 있어 "누가누가 더 가져가나"라는 '행복한 싸움'을 벌였지만 만약 회사 경영이 어려워진다면 감히 고통을 분담하자는 말이라도 나올 수 있을까.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16일 또 대(對)국민 사과를 했다.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며 “매서운 비바람은 제가 맞고 다 제 탓으로 돌리겠다"고 말했다. 감성적인 멘트였고 대다수 국민들의 공감을 받았다.
사측 경영진의 협상력이 시험대에 오른 상황에서 총수의 등판은 최후의 카드였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첫째, 국민을 향해 먼저 낮은 자세를 보임으로써 사측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고 싶어서일 게다. 둘째, 회사가 먼저 자세를 낮추면 정부가 사태 해결을 위해 나설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자 김민석 국무총리가 17일 긴급조정권 발동을 거론하는 등 정부·여당도 삼성전자 노조를 향해 일제히 '경고' 모드로 돌아섰다.
이재용 회장의 대국민 사과를 보면서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할 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리 개운하지는 않았다. 물론 대한민국 최대 기업 총수라도 경우가 딱 떨어진다면 1년에 수십 번이라도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한다. 가령 회사가 중대한 법률 위반을 했거나 아니면 오너 일가가 심각한 비리를 저지른 경우가 그렇다. 그런데 이번이 그런 경우인가.
그동안 삼성전자 노조는 '영업이익의 15%를 성과급으로 고정해 달라'는 과도한 요구로 일반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오죽하면 명강연으로 유명한 황창연 신부는 유튜브를 통해 "삼성전자 노조가 제 정신이 아니며 인세인(insane), 즉 미친 것들"이라고 비판했을 정도다.
평소라면 머리띠를 두르고 노조에게 달려가 파업을 응원할 더불어민주당 인사들도 대체로 차가운 반응이었다. 국회의원 시절 ‘삼성 저격수’로 불렸던 박용진 규제합리회위원회 부위원장은 “삼성전자 노조가 진짜 국민 밉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이번에 이재명 정부는 묻지마 친노조 정책이 국정 운영에 어떤 부담을 주게 될 지 일부 느꼈을 것이다. 야당일 때 바라보는 노사분규와 여당이 되어서 다루는 노사분규는 하늘과 땅 차이다. 문제는 이제 시작이다.
삼성전자발(發) 성과급 갈등은 여타 기업에게 최고의 모델이 될 것이며 반도체·조선·항공·철강 업종 곳곳으로 확대될 위험성이 높아졌다. 특히 '노란봉투법'이 시행되면서 노동쟁의 범위가 넓어져 하청 노조가 원청 기업을 상대로 직접 교섭을 요구할 수 있게 되어 노사분쟁은 협력업체로 확산될 전망이다.
이번에 이재용 회장의 대국민 사과가 아쉬운 이유는 또 있다. 바로 6년 전 이 회장(당시 부회장)이 대국민 사과를 통해 '4세 경영 포기'와 '무노조 경영 포기'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당시 대국민 사과가 '삼성이 잘되기를 바라는 국민에 대한 순수한 죄송함의 표시'라기 보다는 '민노총을 등에 업고 집권한 문재인 정권의 노조 허용 압박에 대한 굴복'으로 비쳐졌다. 당시 그 사과 내용을 얼마나 많은 주주가 찬성했을까.
민노총의 요구를 주요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반기업·친노조 정책을 추진했다.
이재용 회장은 정유라씨에게 승마용 말을 제공한 혐의 등으로 지난 2017년 2월 구속돼 재판을 받다가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 났다. 2018년에는 검찰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다스 소송비 대납 의혹으로 삼성전자를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6000여 건의 노조 와해 공작 문건이 무더기로 발견되면서 대대적인 수사가 진행됐다.
2019년 8월 대법원은 이재용 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항소심을 깨고 원심으로 돌려보냈다. 파기 환송 재판을 맡은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는 삼성에다 준법경영을 위한 특단의 조치를 요구했고 그래서 준법감시위원회라는 묘한 조직이 탄생했다.
당시 재수감 위기에 처한 이재용 부회장은 2020년 5월6일 대국민 사과 형식으로 4세 경영권 승계 포기와 무노조 경영 포기를 선언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2020년 5월 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삼성준법감시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경영권 승계 등과 관련해 입장문을 발표하고 있다. ⓒ데일리안 홍금표 기자
그러나 두 자녀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4세 경영 포기는 다소 성급해 보였다. 이재용 회장의 다음에는 무엇이 기다릴까. 일부 좌파의 끈질긴 소망대로라면 국민연금을 앞세운 공기업화 또는 국유화의 길을 걷든지, 아니면 지분 경쟁 여하에 따라 외국계로 넘어갈 지 모른다. 회사를 쪼개어 제 3의 기업이 인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아들인 이지호 소위의 든든한 모습을 보는 국민들은 어떻게 판단할까. 오너가 있는 조직도 글로벌 전투 현장에서 경영전략을 세우고 밀어 부치는데 애를 먹는데, 공기업이나 국영화된 회사가 그런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할 지 의문이다.
무노조 경영 포기는 그룹 안팎으로 충격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목숨 걸고 지켜 왔던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시대가 달라졌는데 무슨 무노조 경영이냐"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과거 발언을 모아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경쟁사인 현대그룹은 늘 노사분규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된 조업이나 연구개발을 하지 못하는데 삼성에게는 반면교사다. 노조가 있을 경우 협상하고 타협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며 때로 노조가 경영에도 간섭하는데 이는 촌각(寸刻)을 다투는 글로벌 경쟁과 맞지 않는다. 또 한국인은 서양인보다 더욱 대외 명분을 중시하는데, 만일 노조 지도부가 경영진과 타협할 경우 '야합을 한 배신자'와 같은 취급을 받기 쉽다. 그러다 보니 노동단체나 노조 지도부는 선명성을 위해 강경 일변도로 치닫는다. 제대로 통제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노조의 설립은 개별 회사가 자체 사정에 맞게 자율적으로 결정할 일이지 정부나 위에서 강제할 일은 아니다. 해외 초일류 IT 기업 중에 노조가 있는 곳이 많지 않다. 그러므로 경영진은 노조가 없더라도 노조가 있는 기업보다 임금과 복지에서 더욱 나은 대우를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러한 논리는 결국 변경됐다. 이재용 회장은 그런 대국민 사과를 통해서라도 문재인 정권의 마음에 들려는 노력을 했지만, 결과적으론 2021년1월 재수감되고 말았다. 그러면서 삼성에는 노조가 본격화됐다.
이번에 일단 파국을 피했지만 노사 문제는 지속적으로 삼성전자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6년 전 대국민 사과가 시작한 파장이다. 그래서 이재용 회장이 대국민 사과를 다시 하면 좋겠다는 상상도 해 본다.
가령 "2020년 5월 6일 주주나 대다수 국민의 동의없이 했던 대국민 사과가 경솔했음을 사과합니다. 삼성은 현행 노동조합과 관련된 법규를 지키고 이미 설립된 사내 노조의 활동을 존중하겠지만, 창업 때부터 내려온 '무노조 경영'의 정신만은 지켜 나갈 것입니다. 그것은 임직원과 원활한 소통을 바탕으로 회사가 잘될 때는 노조활동이 필요 없을 정도로 급여와 복지를 최고 수준으로 대우하고, 반대로 회사가 어려울 때는 노사가 고통을 분담하는 것입니다. 4세 경영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아 다시 검토할 것이며, 이제 준법감시위원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고 봅니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삼성과 이재용 회장이 이런 조언을 들을 리는 만무하지만, 삼성을 걱정하는 국민들 중 상당수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올바른 민주주의는 '타협의 원칙'(The axiom of compromise)을 중시하지만 '원칙의 타협'(The compromise of axiom)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삼성전자에서 원칙이 잘 지켜지기를 모든 국민은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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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홍섭 칼럼니스트
※외부 필진 칼럼입니다.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