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와 코미디언이 빚어낸 ‘K-유머’의 시너지 [대극장 코미디②]
입력 2026.01.06 14:01
수정 2026.01.06 14:01
집단지성으로 빚어낸 ‘비틀쥬스’식 K-드립
정성화 정원영 김준수...세 명의 비틀쥬스 위한 모의실험
브로드웨이 뮤지컬 ‘비틀쥬스’는 한국 대극장 뮤지컬 시장에서 코미디 장르의 가능성을 새롭게 정의한 작품이다. 촘촘하게 설계된 언어유희와 제4의 벽을 넘나드는 유머를 한국 정서에 안착시키기 위해, 이번 시즌에는 김수빈 번역가와 이창호 코미디 각색가(코미디언)가 손을 잡았다. 이들의 협업은 단순한 번역을 넘어선 ‘언어의 재창조’ 과정에 가깝다.
'비틀쥬스' 김수빈 번역가(왼쪽), 이창호 각색가 ⓒCJ ENM
해외 코미디 뮤지컬이 국내 대극장 무대에 오를 때 가장 큰 장벽은 문화적 맥락과 언어의 차이다. 특히 ‘비틀쥬스’는 텍스트의 원형을 어디까지 유지하고 어디까지 해체할 것인지가 흥행의 성패를 가른다. 이에 대해 김수빈 번역가는 이번 시즌의 변화된 제작 환경을 언급했다.
“이번 시즌은 해외 팀이 한국 스태프를 전적으로 믿고 많은 부분을 열어주셨습니다. 초연 때는 원작자분들도 한국 경험이 처음이었고, 8세 관람가, 코로나19 상황 등의 영향으로 가이드라인이 엄격했는데 이번에는 처음부터 한국 스태프를 믿고 맡겨주셨거든요. 코미디는 결국 같이 웃고 떠들며 공기가 만들어져야 하는데, 마스크를 쓰고 조심조심 보는 분위기가 아니라 시원시원하게 반응하며 갈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체크포인트는 단순했습니다. ‘관객에게 진짜 재미있는가’라는 질문을 템포와 속도감을 잃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던졌습니다.” (김수빈)
여기에 이창호의 합류는 텍스트에 야생성을 더했다. 그는 각색의 시작 단계에서 스스로 제약을 두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작업 초기에는 소재나 수위에 대해 ‘이건 너무 세지 않나’라며 미리 한계를 긋기보다, 재미있다고 판단되는 아이디어는 전부 적어 내려갔습니다. 물론 그대로 무대에 올리는 것은 아니고요. 코미디언으로서 직접 시연하며 검증 과정을 거쳤고, 메타코미디 각색 팀과 함께 장면마다 5개 이상의 다양한 선택지를 준비해 ‘비틀쥬스’ 제작진과 최적의 답을 찾아 나갔습니다.” (이창호)
“번역과 각색의 역할을 칼로 자르듯 나누지 않았습니다. 초, 재연에 걸쳐 저는 대사와 가사, 각색, 드라마투르기를 겸해 작업했고, 여기에 이창호 님이 코미디 각색으로 합류하면서 아이디어의 폭이 훨씬 넓어졌습니다. 무엇보다 뮤지컬, 특히 코미디는 철저한 ‘집단 지성’의 결과물입니다.” (김수빈)
뮤지컬 코미디에서 가사는 정보 전달과 웃음의 리듬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 김수빈 번역가는 가사 작업의 최우선 순위로 ‘음악’을 꼽았다.
“아무리 좋은 말도 음악적 리듬을 거스르면 무대에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특히 빠른 템포의 곡에서는 모든 정보를 100% 전달하기보다, 박자 안에 꽂히는 직관적인 단어들을 배치해 관객의 뇌리에 즉각적으로 박히도록 설계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넘버 ‘세이 마이 네임’(Say My Name)입니다. 비틀쥬스가 자신의 이름을 유도할 때, ‘쥬스’를 설명하기 위해 ‘마셔?’ ‘콜라?’ ‘와인?’ 같은 단어를 쓰고, ‘비틀’을 설명할 땐 비틀거리는 몸짓에 맞춰 ‘취객?’ ‘휘청?’ 같은 단어를 연달아 던지는 식이죠.” (김수빈)
대극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은 유머의 호흡을 다르게 만든다. 소극장보다 관객의 반응이 전이되는 시간이 길기 때문이다. 김수빈 번역가는 이 지점에서 이창호 각색가의 역할이 컸음을 강조했다.
“작업하다 보면 템포가 빨라져 관객을 두고 제작진끼리만 달려버리는 순간이 생기는데, 그때마다 이창호 작가가 관객이 함께 탑승할 수 있는 기술적인 타이밍을 잡아주셨습니다. ‘비틀쥬스’는 서사 도중 빠져나와 스탠드업 코미디를 펼치는 형식을 취하는데, 한국 관객이 낯설어할 수 있는 포인트죠. 그래서 초반부터 ‘제4의 벽’을 깨고 이 양식을 인지시키기 위해 공을 들였어요. 예를 들어 비틀쥬스가 아담과 바바라의 집을 소개하며 ‘저기 니들 티켓값의 반이 들어간 28억짜리 세트가 나온다’라고 하는 등 메타적인 유머로 관객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주력하는 거죠.” (김수빈)
코미디언으로서 자유로운 애드리브에 익숙한 이창호 각색가에게 뮤지컬은 ‘약속의 예술’이라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코미디 공연에서는 웃음 포인트가 터지면 악어나 상어처럼 그 상황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맛이 있죠. 그 상황을 절대 놓아주지 않아요. 하지만 뮤지컬은 철저히 ‘약속된 플레이’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 새로웠습니다. 정해진 음악과 리듬에 맞춰 대사가 오가야 하기에, 웃음을 길게 끌고 가기보다는 짧고 강렬하게, 임팩트 있게 터뜨리는 방식으로 각색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창호)
ⓒCJ ENM
또한 이번 시즌 비틀쥬스 역을 맡은 정성화, 김준수, 정원영 세 배우의 개성을 살리는 것도 주요한 과제였다. 이창호 각색가는 배우별로 대사를 다듬는 ‘모의 실험’을 거쳤다.
“각색 단계에서 제가 직접 세 분의 배우가 되었다고 가정하고 대사를 뱉어봤어요. 정성화 선배님은 코미디언 출신으로 누구보다 코미디 호흡을 잘 아시기에 ‘클래식’하게, 정원영 선배님은 코믹 캐릭터 연기 경험이 많고 어떤 캐릭터든 잘 소화해 내시기에 ‘도전적’인 시도를, 김준수 선배님은 워낙 코미디를 좋아하시고 개인의 장점이 뚜렷하기에 그 매력이 돋보이도록 ‘귀엽게’ 표현하는데 중점을 뒀습니다.” (이창호)
김수빈 번역가 역시 대본상에 ‘배우가 놀 수 있는 빈칸’을 열어두며 자율성을 부여했다.
“연습실은 마치 ‘오징어 게임’ 같았습니다. 배우와 스태프가 던지는 수많은 아이디어 중 끝까지 살아남는 것만이 무대에 오르죠. 반드시 지켜야 할 ‘큐 대사’를 제외하고는 배우가 자신의 장점에 맞춰 자유롭게 채울 수 있도록 조율했습니다. 다만 맷 디카를로 연출님과 심설인 협력연출님이 은유적인 표현으로 ‘공중에 띄운 공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연출진은 그 애드리브가 장면의 진행을 멈추게 하면 바로 컷팅하며 균형을 유지했습니다.” (김수빈)
‘비틀쥬스’는 블랙 코미디와 금기를 건드리는 유머를 핵심으로 한다. 이는 자칫 한국 정서에서 불편함을 유발할 수 있는 요소다. 김수빈 번역가는 이 경계선을 찾는 것이, 가장 어려운 작업이었다고 회상한다.
“연습실에서 ‘너무 과하다’는 의견이 나오면 과감히 덜어냈고,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은 프리뷰 기간 관객 반응을 보며 수정했습니다. 단순히 불쾌함을 주는 요소는 제거하되, 비틀쥬스라는 캐릭터가 가진 통렬한 풍자와 ‘매운맛’은 유지하여 웃음은 남기고 불편함은 덜어내는 균형점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김수빈)
최근 한국 뮤지컬 시장에서는 ‘미세스 다웃파이어’나 ‘슈가’처럼 대중성과 위트를 겸비한 대극장 코미디가 연이어 성공을 거두고 있다. 두 사람이 생각하는 코미디 뮤지컬의 가치는 관객의 ‘행복’으로 수렴된다.
“뮤지컬은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낯선 이들과 모이는 일종의 ‘모험’입니다. 관객이 ‘아, 내가 마음껏 즐겨도 되는 시간이구나’라고 안심하고 들어와서 결국 웃으며 나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코미디 뮤지컬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성취라고 생각합니다.” (김수빈)
“‘비틀쥬스’는 관객이 느낄 수 있는 모든 희로애락을 꽉 채운, 그야말로 ‘죽여주는’ 공연입니다. 이보다 완벽한 엔터테인먼트가 있을까요? 이번 작업은 저 혼자가 아니라 메타코미디 각색 팀(채림, 성구, 나경, 정민)이 함께 머리를 맞댄 결과물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창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