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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에 대한 반란 3탄 – 조위총의 난 [정명섭의 실패한 쿠데타㉖]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5.12.23 14:00
수정 2025.12.23 14:00

의종 24년인 서기 1170년 8월에 벌어진 무신들의 반란은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원인 제공자인 의종은 폐위당한 채 거제도로 쫓겨났다가 김보당의 반란에 엮이면서 목숨을 잃었다.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격인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 역시 평탄한 운명을 걷지는 못했다. 잠깐의 권력을 누리기는 했지만 역사에 역적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다. 특히, 이의방은 이의민을 시켜서 의종을 죽은 희대의 패륜아이자 반역자로 각인되고 만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바꿔놓을 일들이 쉴 새 없이 벌어졌다.


1171년에는 이고가 다른 동료들을 제거하려다가 낌새를 친 이의방에게 참살당했고, 1173년에는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이 진압되고 몇 달 지나지 않은 1174년 정월에는 귀법사를 비롯한 개경 주변의 사찰에 있는 승려들이 무신 정권에 반기를 드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움직임을 진압한 것은 이의방이었는데 방법은 간단했다. 닥치는대로 죽이고 가담자들이 머문 사찰과 집들을 불태워버리는 것으로 대응한 것이다. 멀리 보지 못하는 이의방은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그 중 한명이 바로 서경유수 조위총이었다.


고려군이 사용한 무기 유물 ⓒ정명섭 제공

서경은 이미 묘청의 반란 때 한번 크게 타격을 입고 위상이 흔들린 상태였다. 시간이 오래 지나기는 했지만 원한을 잊을 정도는 아니었다. 조위총이 여기에 불을 질러버렸다. 무도한 무신 정권을 타도하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고 말이다. 조위총은 가계나 반란을 일으키기 전의 일은 잘 알려져있지 않다. 아마도 반란이 실패로 끝나고 집안이 송두리째 멸문지화를 당하면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당시 서경유수였던 조위총은 명종 4년인 1174년 9월에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킨다.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군사를 일으켜 정중부, 이의방을 치려고 도모하였으며, 동계와 북계 양계의 여러 성에 격문을 보내어 사람을 불러 모았다.


고려사에는 굉장히 짧고 담담하게 반란의 시작을 알린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반란이 일어났다. 현담윤이 지키는 연주성을 제외하고 자비령 북쪽의 모든 성들이 반란에 가담한 것이다. 전년도에 비슷한 지역에서 김보당이 일으킨 반란에서는 이렇게 대규모로 가담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조위총이 김보당과는 달리 차근차근 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 삽시간에 북쪽 지역의 성들이 반란에 가세하면서 개경에서는 엄청난 위기감을 느낀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진압군은 윤관 장군의 손자인 윤인첨이 맡았다. 윤관 장군의 후손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윤인첨이 무신들에게 동정적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윤인첨은 윤관이 아니었다. 절령역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윤인첨이 이끄는 진압군은 조위총의 반란군의 매복에 걸려 크게 패하고 말았다.


진압군을 물리친 조위총의 반란군은 기세를 몰아 개경 근처까지 진격한다. 크게 분노한 이의방은 개경에 있는 서경 출신 관리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서 목을 내걸고 출격한다. 이의방이 이끄는 군대는 조위총의 반란군을 압도한다. 개경 코 앞까지 밀고 내려온 서경의 반란군은 크게 패배해서 쫓겨난다. 정신없이 퇴각한 조위총의 반란군은 다시 서경으로 돌아간다. 그 와중에 이의방은 조위총의 아들을 포로로 잡는다. 하지만 이의방이 이끄는 진압군은 서경성의 철통 같은 방어망을 뚫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 겨울이 찾아오고 추위와 보급의 부족으로 인해 이의방은 퇴각해야만 했다.


분을 삭이면서 돌아선 이의방은 날이 풀리면 돌아와서 끝장을 내겠다고 호언 장담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다. 이의방은 동료인 이고를 제거한 이후에 귀법사를 비롯한 개경 인근의 사찰들을 불태우고 김보당의 난을 빌미삼아 의종을 시해했으며, 결정적으로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는 짓을 저질렀다. 특히, 자신의 권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딸을 태자비로 들이는 것은 무신 정권내에서도 강력한 반발을 샀다. 특히, 정중부 측에서 불쾌하게 여겼는데 아들인 정균이 칼을 갈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이의방은 1174년 12월, 개경 근처에 있는 윤인첨의 군영을 방문한다. 내년 봄에 다시 서경을 공격할 군대를 소집해서 훈련 중이었는데 얼마나 잘 준비되었는지 살펴보러 간 것으로 보인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정균은 승려인 종참등을 시켜서 이의방을 급습한다. 싸움에서는 천하무적이었지만 기습은 예상하지 못한 이의방은 그곳에서 마침내 목숨을 잃는다. 이 때가 갑오년이라서 갑오정변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으로 인해 이의방과 측근 세력들은 완전히 몰락해버린다. 조위총의 반란으로 인한 나비효과라고 할 수 있겠다.


이의방이 죽는 바람에 조위총은 잠시 생명 연장을 한다. 하지만 혼란을 수습한 무신 정권에서는 다시 윤인첨을 지휘관으로 하는 진압군을 보내고 서경을 포위해버린다. 궁지에 몰린 조위총은 금나라에 사람을 보내서 땅을 바칠테니 도와달라고 하지만 거절당한다. 결국 1176년 6월, 윤인첨의 진압군이 서경성을 함락시킨다. 사로잡힌 조위총은 목이 베어진다. 2년 동안 끈 반란은 진압한 무신 정권의 실권자들은 크게 안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신 정권에 항거하는 반란은 이제 시작이었다.




정명섭 작가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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