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카카오톡
블로그
페이스북
X
주소복사

극장의 확실한 흥행 카드, 일본 애니메이션의 시대 [J무비 전성시대①]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5.12.09 15:28
수정 2025.12.09 15:28

한국 극장가의 중심축이 이동하고 있다. ‘귀멸의 칼날’과 ‘스즈메’, ‘8번 출구’까지 이어지는 흥행세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 젊은 세대의 취향과 관람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신호다. 팬덤 기반 사전예매, 주차별 굿즈 이벤트를 견인하는 반복 관람, OTT 알고리즘을 통해 형성된 친숙함이 맞물리며 일본 영화들이 제작비 상승과 라인업 공백으로 흔들리는 한국 영화 사이에서, 취향과 소비 구조를 선점해 새로운 주류로 부상했다.


지난 8월 22일 개봉해 첫 주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장악한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은 566만 관객을 모으며 올해 한국 극장가 최다 매출을 기록했다.


작품을 둘러싼 상징 논란에도 불구하고 ‘귀멸의 칼날’의 흥행은 의미가 있다. 주인공 탄지로의 귀걸이 문양이 욱일기를 연상시킨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수출판에서 디자인이 수정될 정도였지만, 실제 흥행은 예상치를 훌쩍 넘어섰다.


특히 20대와 남성 관객을 중심으로 반복 관람이 이어지며 장기 상영 흐름을 만들었다. 여기서 보여준 변화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향한 ‘강력한 팬덤’이다.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의 경우 사전 예매량이 90만장을 넘어 올해 개봉작 통틀어 최고 예매량을 달성했다. 팬덤이 초기 예매량을 주도했고, 이후 화력을 키워 흥행을 만들었다.


NEW 유통전략팀 류상헌 팀장은 “이런 압도적인 예매량을 바탕으로 개봉일 상영점유율이 53%를 넘어 무려 126만석 이상의 좌석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비슷한 관객수를 기록했던 ‘좀비딸’의 개봉일 상영 점유율이 36.8%밖에 되지 않았던 것과 비교할 때 지금의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팬덤의 화력을 통해 초기 동력을 얼마나 강하게 만들고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분석했다.


팬덤을 바탕으로 한 일본 애니의 흥행은 ‘귀멸의 칼날’ 이전에 예고됐다. 2024년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490만 명을 돌파하며 전 세대를 아우르는 관객층을 확장했고, 2023년 ‘스즈메의 문단속’은 당시 일본 애니메이션 최초로 5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업계에서는 애니메이션이 기존의 든든한 팬덤에 기댈 수 있어 리스크가 적은 장점이 있는 콘텐츠라고 바라보고 있다.


여기에 높은 충성도에 기인한 굿즈 구매와 N차 관람은 주차별 굿즈 이벤트 기획을 통해 좌석수 유지가 가능하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장기 상영으로 이어진다.


류 팀장은 “일본 콘텐츠의 완성도가 특히 기술적인 측면에서 한국 콘텐츠와 비교해 수준이 월등하다 단평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만화책에서부터 출발한 안정적이고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이 있고 그것을 어려서부터 즐겼던 탄탄한 관객층이 있다는 것이 일본 콘텐츠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일본 실사 영화도 어느새 한 자리를 차지했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가 100만 명을 넘기며 21년 만에 국내 일본 실사 영화 흥행 기록을 다시 썼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의 ‘남은 인생 10년’ 가와무라 겐키 감독의 ‘8번 출구’도 흥행 흐름을 탔다. ‘8번 출구’는 44만 관객을 돌파하며, 개봉 당시 한국을 찾았던 코치 야마토가 재내한을 확정하기도 했다. 지난 달 19일 일본에서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재일 한국인 이상일 감독의 ‘국보’도 관심 속에서 개봉했으며 10일에는 미야케 쇼 감독의 ‘여행과 나날’이 관객과 만난다.


한때 ‘왜색 문화’라고 명명되며, 수입조차 금지되던 일본 작품들이 극장가에서 당당히 경쟁력을 갖춘 셈이다. 이 변화의 출발점은 1998년부터 시작한 일본 대중문화 개방 조치였다. 당시 대중문화계를 비롯한 적잖은 이들이 우려를 표했지만, 정부는 단계적으로 개방했다. 영화‧출판‧비디오‧가요 등이 순차적으로 규제가 풀렸다. 그러나 흥행과 화제성은 애니메이션 일부에 한정됐을 뿐, 개방이 곧 폭발적인 일본 대중문화 소비로 이어지진 않았다.


일본 콘텐츠에 대한 심리적 장벽과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견고했다. 개방은 했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온 ‘은밀한 취향’의 영역에서 여전히 머물러 있던 셈이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 OTT 시대가 열리면서 상황은 완전히 뒤집혔다.


일본 콘텐츠는 TV 편성이나 수입 정책 같은 외부 장벽 없이 ‘취향 알고리즘’을 통해 자연스럽게 소비됐다. 여기에 Z세대의 등장이라는 결정적 변화가 겹쳤다. 성장기부터 ‘포켓몬스터’ ‘이웃집 토토로’ 등 일본 애니메이션을 당연하게 접해온 세대는 일본 문화를 정치적 맥락이 아니라 ‘취향’의 범주로 본다. 특정 국가의 콘텐츠라서 피하거나 숨길 이유가 사라졌고, 선택 기준은 오직 완성도·감정선·장르적 매력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소비 변화는 산업 현장에서도 분명하게 감지된다. 류 팀장은 “과거 일본 콘텐츠는 소위 마니아 계층이 취미생활 정도로 즐기는 수준이었다면 요즘은 국가 경계를 넘어 주류 콘텐츠로서 콘텐츠와 정서와 문화를 즐기는 관객층이 넓어졌다고 생각한다. 특히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경우 국내에서 강력한 팬덤을 바탕으로 흥행 가능성이 높은 IP가 되었다고 판단한다”라고 말했다.


금지 조치로 인해 접하지 못했던 일본 문화 콘텐츠는 다른 형태로 한국 관객과 만나고도 있다. 소마이 신지처럼 1980~1990년대에 활발히 활동했지만, 당시 한국에서는 정식 개봉조차 할 수 없었던 감독들의 작품이 4K 복원 흐름과 함께 뒤늦게 극장에 걸리기 시작했다. 2023~2024년 일본 요미우리 방송협회가 보관하던 35㎜ 원본 네거티브를 복원한 덕분에 ‘이사’ 같은 작품은 국내 관객에게 오히려 ‘새로운 콘텐츠’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과거 접하지 못한 작품을 지금에서야 만나는 ‘시간차 소비’가 일본 콘텐츠의 저변을 다시 넓히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 콘텐츠의 소비가 2019년 ‘노재팬’ 국면에서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고, 곧이어 도래한 코로나19 시기에는 오히려 극장가의 공백을 메우는 역할까지 했다는 점이다. 2019년 ‘날씨의 아이’는 259일 장기 상영 기록을 남겼고, 2021년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는 팬데믹 시기에 222만 관객을 돌파하며 누적 매출 206억 원을 넘겼다. 만화 시장에서도 ‘귀멸의 칼날’ 시리즈가 당시 판매 차트 상위권을 독식했다. 정치적 감정이 고조됐던 시기에도 애니메이션과 만화 기반 콘텐츠는 꾸준히 소비됐고, 한국 영화 개봉이 지연되거나 축소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은 극장가에서 사실상 ‘확실한 흥행 카드’로 기능했다. 코로나19 이후 제작 환경이 급격히 경직되면서 한국 영화계는 제작비 급등·투자 위축·중간 규모 작품의 붕괴라는 삼중고를 겪었다. 인건비와 세트 비용 상승으로 제작비가 30% 이상 높아졌고, OTT 중심으로 투자 구조가 재편되며 극장용 상업영화에 향하던 자본은 빠르게 줄었다.


그 결과 올해만 해도 중·대형 한국영화의 개봉 간격이 비정상적으로 길어지며, 극장 라인업 공백이 장기화하고 있다. 산업의 공급 기반이 흔들리는 사이, 반복 관람과 굿즈 소비를 견인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그 자리를 자연스럽게 메우며 안정적 선택지로 자리잡았다.


이에 대해 류 팀장은 “한국 영화 부재 구간에서 관객 이동이 없었다고 보긴 어렵다. 코로나19 당시 한국 영화가 개봉을 주저할 때 ‘귀멸의 칼날: 무한 열차편’이 배급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며 장기 상영과 200만 관객을 기록했고, 이 경험이 지금의 흥행 IP 기반을 만들었다. 최근 일본 콘텐츠는 이미 높은 인지와 배급 노하우를 확보했기 때문에 한국 영화가 활기를 되찾더라도 영향력은 쉽게 줄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댓글 0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