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이 만든 혁명…지방자치 30년 [풀뿌리 30년 도전①]
입력 2025.10.28 11:15
수정 2025.10.29 08:24
1995년 주민이 주인 된 첫날의 기억
정책 실험에서 마을 혁신까지
수도권 쏠림・지방소멸은 ‘미래의 숙제’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유세현장.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풀뿌리 30년 도전’은 1995년 한국 지방자치의 부활 이후, 지역을 중심으로 지탱돼 온 민의와 참여, 그리고 변화와 숙제들을 객관적 데이터와 심층 분석으로 조명하는 기획시리즈다. 30년 간 ‘주민이 주인’이라는 민주주의의 가치가 행정, 재정, 참여에서 어떻게 제도화됐고, 또 어디서 멈춰 섰는지 통계와 현장증언을 아울러 살펴본다. 국내외 분권·자치의 최신 흐름 및 해외 주요 성공·실패 사례를 함께 다뤄, 향후 한국 지방자치의 지속 가능한 미래와 정책 대안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민선자치가 부활한 지 30년, 풀뿌리 민주주의가 걸어온 길을 냉정하게 돌아봐야 할 때다. 1995년 전면 부활한 한국의 지방자치는 ‘주민이 주인’이라는 가치 아래 행정·재정·사회 변화의 동력이 됐다.
그러나 수도권 집중과 주민 체감 한계 등 풀어야 할 과제도 여전하다. 데이터와 현장의 목소리로 30년 도전의 자취와 남은 숙제도 산적하다.
새로운 시대, 골목에서 시작된 변화
“실제로 우리 사회가 주민 중심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행정의 언어가 살아있는 생활언어로 번역된다는 의미다. 진짜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으로 자리바꿈한 것이다.” (육동일 한국지방행정연구원장)
1995년 6월 27일.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전국 방방곡곡 골목마다 펼쳐졌다. 바로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열린 날이다. 이날 전국 3543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도지사와 시장·군수·구청장 그리고 시·도·군·구의회의원까지 ‘네 가지 선거’가 사상 처음 진행됐다.
이 선거는 30여 년 만에 부활한 지방의회와 더불어 드디어 지방자치단체장까지 주민이 직접 뽑는 첫 실험이었다. 무엇보다 이례적으로 전국 각지에서 선거관리협의회, 지역 주민단체, 언론사들이 모여 ‘골목의 대표’를 한 번에 뽑는 장면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당시 현장엔 설렘과 동시에 긴장감도 감돌았다. 경북의 한 구의원은 “한 표를 던질 때, 진짜 내 정책이 결정된다는 실감이 들었고, 가족 모두가 투표장 앞에서 한 번 더 서로의 의견을 나눴다”고 회상했다.
많은 이들이 마을회관 앞, 오래된 피아노 위에 놓인 기표용지를 신중히 살폈다.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그날 주민들의 시선은 ‘동네 살림’을 맡을 진정한 일꾼을 뽑는 책임과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주민참여와 동시에 이 시기를 전후해 ‘내가 사는 동네에 실제로 변화를 줄 수 있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젊은 유권자와 청년 사회단체, 자원봉사단이 지역 선거에 대거 합류했다. 대학생 기자단은 현장 취재로 각종 정책 제안서를 정리해 여러 신문에 기고했다.
이 선거의 제도적 의미도 컸다. 별도 법령이었던 시장·의원·장 선거법이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으로 통합됐다. 참여 저변이 대폭 확대된 것이다. 비례대표제가 전국적으로 전면 시행되고, 외딴 섬 거주자를 위한 순회투표제 도입도 이 시기다. TV토론·공론장 문화도 성장했다.
무엇보다 이날 이후 ‘주민이 주인’이라는 명제가 법과 제도, 생활 속에 현실이 됐다. 동네 골목 구석구석에서 시작된 그런 민주주의의 변화가 한국 사회 30년의 힘이자 도전의 출발점이 됐다.
지난 30년 지방자치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에 따른 양극화도 이뤄졌다. 앞으로 미래의 지방자치는 어떤 변화가 이뤄질지 주목된다. ⓒ데일리안 AI 삽화 이미지
30년의 데이터에 담긴 ‘성장의 궤적’
지난 30년간 한국 지방자치는 수치로도 뚜렷한 변화를 남겼다. 1995년 4만6551건이던 자치법규는 2023년 13만8870건으로 3배 넘게 늘어났다. 자치단체 권한의 폭이 크게 확대됐다는 방증이다.
지방자치단체에 이양된 행정사무 비중 역시 1994년 13.4%에서 2024년 36.7%로 증가했다. 실질적 지방분권의 기반이 강화됐다.
주민참여 측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진전이 있었다. 전국적으로 1800여 곳 주민자치회가 활발히 운영되며 주민이 직접 예산 편성에 참여하는 ‘주민참여예산제’는 226개 지방자치단체로 확산됐다. 30년 전과 비교해 생활밀착형 정책과 주민의 정책 결정 권한이 확실히 넓어진 셈이다.
재정 측면에서는 지방세 비중이 1995년 21.2%에서 2023년 24.6%로 다소 증가했지만 전체 재정자립도는 1997년 63%에서 2024년 48.6%로 낮아졌다.
지방정부가 스스로 예산을 자율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비율인 재정자주도 역시 2007년 79.5%에서 2024년 70.9%로 감소했다. 이는 지방세수 기반 확대와 자율적 예산 운용의 필요성이 여전히 강하게 제기되는 이유다.
이러한 성과는 지역 현장 변화와도 맞물린다. 자치분권 30년은 권한의 확대와 주민참여 문화의 정착을 이끌어냈다. 다만, 재정지표의 하락은 제도의 성장 이면에 남은 과제임을 동시에 보여준다.
실제로 지난 8월 행정안전부가 민선 지방자치 30주년을 맞아 전국 19세 이상 성인 남녀 2000명, 전문가 및 17개 시도 공무원 700명을 대상으로 ‘지방자치제도’ 전반에 대해 진행한 주민 인식조사에 따르면 지방자치 필요성은 주민 62%·전문가 83%·공무원 71%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실제 성과 체감은 주민 36%, 전문가 50%, 공무원 53%에 그쳤다. 참여 기회는 늘었어도 실질 참여 경험자는 14%에 불과하다는 조사도 나왔다.
한국지방행정연구원 박진경 박사는 “지방자치는 국민주권의 확장과 창의적 행정이 만나야 비로소 완성된다. 그 길에는 시민 한 명 한 명의 행동, 그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방소멸은 한국사회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다. ⓒ퍼플렉시티
절실해진 지방소멸 시대의 자치 혁신
충남 홍성의 농민 박모씨는 “이장님이 바뀌고, 동네회관이 새로 생겼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도시로 떠난다. 그래서 자치가 정말 ‘내 삶’을 바꿨는지 다시 질문하게 된다”고 말한다.
인구 감소, 수도권 쏠림, 지방소멸 위기는 전국 229개 지자체 중 159개 지역에서 여전히 심각하다. 지방경제와 고용, 성장 동력이 지역적으로 분화되는 추세 속에서 ‘주민 참여’와 ‘자치역량’ 강화가 절실하다.
김민재 행정안전부 차관 역시 “주민이 주인이 되는 실질적 지방자치를 위해서는 지난 30년간의 성과와 한계를 냉정히 점검해야 한다”며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분권의 실질화를 반드시 이룰 것”이라고 강조했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여정은 진행형이다. 각종 지역 현안, 참여제도, 예산 운영 혁신 모두가 ‘주민의 삶’과 맞닿아 있다. 지난 2024년 4월 부산 시민단체는 “다음 10년은 행정 개혁보다 주민 행복의 지표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가 핵심”이라고 선언했다.
전문가들은 현장 거버넌스에서 시작하는 생활 정책의 진화를 새로운 자치시대의 열쇠로 꼽는다. 단순히 소수 지역의 위기가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 균형발전을 위협하는 구조적 문제임라는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 행정전문가는 “이제 한국 지방자치는 단순한 행정분권을 넘어, 인구와 경제, 지역의 미래를 지키는 존립 차원의 대응이 불가피하다”며 “풀뿌리 민주주의의 다음 30년을 위해 ‘지방소멸’이라는 위기를 정면으로 들여다보고 지속가능한 해법, 실질적 체감 변화를 만드는 제도 혁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