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감수성 발전했지만…콘텐츠 속 ‘그루밍 미화’는 여전히 사각지대 [D:이슈]
입력 2025.07.07 11:49
수정 2025.07.07 11:49
2002년 방송된 MBC 드라마 '로망스'는 여교사와 고등학생 제자의 연애를 다루며 시청률 30%를 돌파했다. 2012년 개봉한 영화 '은교' 역시 두 사제의 관계성을 그리는 과정에서 17세 여고생인 은교의 베드신이 등장하는 등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임에도 130만 관객을 모았다. 콘텐츠 속 미성년자의 ‘연애’와 ‘베드신’에 대해 딱히 심각성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은교’ 개봉 이후 약 13년이 흐른 현재, 이러한 콘텐츠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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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N에서 방영될 예정이던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언더피프틴'을 향한 대중의 비판은, 그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15세 이하의 여성 아동이 출연하는 이 프로그램은 참가자들의 프로필 사진이 공개된 후 방송 전부터 ‘아동 성 상품화’ 논란에 휘말렸고, 결국 편성 자체가 취소됐다. 당시 초등교사노조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의 교원 단체는 성명을 내고 아동 성상품화와 교육권 침해, 정서 발달 저해 등의 문제를 지적했다.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내가 사랑하는 초등학생'의 제작 소식이 알려진 후에도 대중의 반응은 차가웠다. '내가 사랑하는 초등학생'은 여교사와 초등학생의 연애 감정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의 교원 단체는 성명을 통해 "이런 작품이 로맨스나 판타지로 소비될 경우 현실에서 벌어지는 그루밍 범죄의 심각성이 희석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원작은 네이버와 카카오 등 각종 웹툰 플랫폼에서 판매가 중단됐고 드라마 제작사 또한 제작 중단 소식을 전했다.
비단 콘텐츠뿐 아니다. 배우 김수현이 김새론과 미성년자 시절부터 교제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국회 전자청원 게시판에는 "미성년자 의제강간죄의 해당 연령을 상향시키고 형량을 강화해달라"는 청원글이 올라왔다. 이 청원은 5만 명이 넘는 이들이 동의하며 국회 소관 위원회로 넘겨졌다.
변화된 국민 정서는 제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부는 10월부터 시행될 개정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청소년성보호법)을 통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그루밍 행위가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 이뤄져도 형사처벌이 가능할 수 있도록 했다. 성범죄자 취업제한 기관에 외국교육기관, 청소년 단체, 대안교육기관도 새롭게 추가됐으며,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의 장이 성범죄자 취업 여부 확인에 필요한 자료 제출 요구에 불응하거나 거짓 자료를 제출했다면 300만원 이하 과태료가 부과된다.
다만 이러한 법률적 조치는 실제 사건에만 적용될 뿐, ‘미성년자 그루밍’이라는 문제적 서사를 다루는 콘텐츠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아직까지 드라마나 영화, 웹툰 등 창작물 속에서 그루밍이나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남녀 관계가 낭만적으로 포장되더라도 이를 법적으로 제한할 명확한 규정이 없는 상황이다. 물론 표현의 자유와 창작자의 예술적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가 늘 존재하는 만큼 구체적인 규정을 마련하는 일은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 그러나 대중매체의 영향력이 날로 커지고 있는 만큼 최소한의 구체적인 윤리적 가이드에 대한 논의는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