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작의 그늘에서 ‘허리’를 다시 세우다 [중예산 영화 부활 프로젝트①]
입력 2025.06.27 14:01
수정 2025.06.27 14:01
중간 규모 영화의 반격
"허리급 영화가 꾸준히 만들어져야 산업 생태계가 복원"
한국 영화산업에서 중간 규모 영화, 이른바 '허리급' 영화는 산업의 중심축 역할을 해왔다. 보통 순제작비 30억 원 이상 100억 원 미만이 투입된 작품들을 중간 규모 영화로 분류하며, 대형 블록버스터보다 제작 리스크는 낮으면서도 독립영화보다는 상업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춘다는 점에서 산업 내에서 균형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멀티플렉스 중심의 시장 재편과 대기업 자본의 본격 유입으로 산업 규모가 급속히 팽창하는 동안, 대작 중심의 투자와 유통 구조는 점차 고착되었고, 그 결과 작품의 다양성과 경쟁력은 오히려 약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이 같은 쏠림 현상이 더욱 심화되었고, 중간 규모 영화는 산업 내에서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다.
이러한 구조적 환경 속에서 팬데믹 이후 투자와 배급은 더욱 대형 IP와 프랜차이즈에 집중되었고, 중간 규모 영화는 사실상 산업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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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규모가 작더라도 마케팅 비용까지 포함하면 총제작비 100억 원 이하로 영화를 완성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고, 손익분기점을 맞추기 위해 필요한 관객 수는 200만 명 이상으로 높아져 현실적으로 부담스러운 기준이 되어버렸다.
여기에 최근 몇 년 사이 '외계+인', '더 문', '비공식작전',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 등 이른바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이 잇달아 흥행이 참패하면서 한국영화 자체에 적신호가 켜졌다. 영화가 흥행을 하지 못하면서 투자 심리가 위축됐고, 이는 곧 다양한 영화가 제작되는 생태계 기반을 흔드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다만 다행스러운 건 지난해부터 이 흐름에 균열이 감지됐다는 점이다. 특히 지난해 여름 극장가에서 '파일럿'이 누적 약 471만 명을 모으며 손익분기점인 200만 명을 훌쩍 넘어섰고, '핸섬가이즈'(약 177만 명, 손익 약 100만 명), '탈주'(약 256만 명, 손익 약 200만 명) 역시 기대 이상 성과를 거두며 전통적으로 대작 중심이었던 여름 극장가의 흥행 공식을 새롭게 썼다.
영화진흥위원회는 이에 대해 "여름 성수기가 곧 한국 대작 영화의 수확기라는 기존의 배급 패턴에 변화가 나타난 풍경"이라고 분석했다.
이외에도 '시민덕희'(171만 명, 손익 약 180만 명), '그녀가 죽었다'(123만 명, 손익 약 150만 명), '소방관'(385만 명, 손익 약 250만 명) 등이 흥행에 성공했다.
여기에 올해 초 개봉한 ‘히트맨2’와 ‘검은수녀들’도 중예산 영화의 선전을 이어갔다. 160만 명 손익분기점이었던 ‘히트맨2’가 254만명을 기록해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 중 2위 성적을 거뒀고 '검은수녀들'도 160만 명의 손익분기점을 넘은 165만 명이 관람했다. '히든페이스'는 (100만 명, 손익 약 140만 명) 극장 손익분기점에는 다소 못 미쳤지만, IPTV·VOD·해외 판권 등 부가 수익을 고려해 사실상 본전을 회수했다.
이 흐름이 일회성 반짝 성공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영화계 안팎에서 들리고 있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허리급 영화들이 꾸준히 기획되고 배급될 수 있는 환경이 뒷받침돼야 산업 생태계가 실질적으로 복원될 수 있다"라며 "중예산 영화가 특정 연령대나 팬층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인 정서, 일상에서 파생된 서사, 배우 중심의 친숙한 캐릭터, 장르적 재미와 적당한 긴장감을 고르게 갖춘 균형 잡힌 구성 등이 ‘가볍게 보기 좋은 영화’로 인식돼 관객들이 극장에 올 수 있는 유효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
중예산 영화는 대형 자본이 주저하는 소재나 비주류 장르, 사회적 메시지를 실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창구이자, 신인 감독이 상업영화에 진입할 수 있는 관문이기도 하다. 이 구간의 영화가 지속적으로 제작돼야 하는 이유는 단지 수익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창의적인 스토리텔링과 실험성으로 한국 영화의 지평을 넓힌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예산 영화에서 두각을 드러낸 감독들은 이후 한국 상업영화의 새로운 중심축으로 떠올랐다. '청년경찰'(2017)은 김주환 감독의 데뷔작으로, 약 70억 원대 중예산으로 제작돼 565만 명을 동원하며 당시 신인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장재현 감독의 '검은 사제들'(2015) 역시 67억 원 규모로 제작돼 544만 명의 관객을 기록하며, 단숨에 흥행 감독 반열에 올랐고 백종열 감독의 '뷰티 인사이드'(2015)는 약 50억 원대 예산으로 제작돼 약 200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이에 김주환 감독은 '청년경찰' 이후 영화 ‘사자’를 비롯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사냥개들', 영화 '무도실무관'으로 활동 무대를 넓혔고 장재현 감독은 오컬트 장르를 강화해, '파묘'로 2024년 1000만 관객을 돌파, 흥행 정점에 섰다. 백종열 감독도 '뷰티 인사이드' 성공 후 '독전2’' 영화 '부활남' 등 굵직한 작품을 연출하며 장르적 감각과 스타일을 유지한 채 필모그래피를 확장 중이다.
중견 감독들 역시 대작과는 다른 창작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틈새시장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이 구조가 무너지면 신인 데뷔 루트가 사라지고, 산업은 검증된 IP나 배우 중심의 반복 구조에 갇히게 된다.
중예산 영화를 주로 배급한 관계자는 "이 신호를 산업 전체의 지속 가능한 체질 개선을 위한 전환점으로 삼아야 한다. 허리급 영화의 부활은 곧 창작 다양성의 회복이자, 한국영화가 다시 관객의 폭넓은 선택을 받기 위한 필수적인 발판이다. 이 흐름을 끊기지 않게 이어가기 위한 관심과 산업 전반의 재정비가 이어져야 한다"라고 짚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