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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라니! 어느 버스안내양의 항변


입력 2009.03.18 14:22 수정

<그리운 나라, 박정희>대통령 연두회견서 안내양에 반말 말자

박근혜에게 딱한 사연 듣고 방한복 1만벌 제작 버스회사 전달도

버스안내양 부활 이벤트

17일 서울시내 버스에 안내양이 등장해 승객들의 안내와 승하차를 돕는 친절 서비스를 펼쳐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6070시대로 돌아간 듯한 아련한 추억과 함께 즐거움을 선사했다.

서울시가 경기침체 등으로 힘겨워하는 시민들에게 좀 더 편안하고 즐겁게 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마련한 ‘HAPPY BUS DAY(해피버스데이)’ 이벤트였다.

서울시 도시교통본부는 ‘서울 시내버스엔 행복 바이러스가 넘쳐요’ 제하의 보도자료를 통해 추억의 버스안내양 이벤트를 매 분기마다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추억이란 그리움의 아이콘이다. 엔터키를 쳐서 불러온 그 시절의 고달픔이나 슬픔이 그대로 재현되지 않고 아름답게 채색되어 살아나는 것은 그리움의 마력 같은 작용이다.

서울시가 부활시킨 버스안내양들은 늘씬한 몸매에 멋진 유니폼을 입고 밝게 웃는 모습이었고, 언론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서민들의 표정이 오랜만에 환해졌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중년 이상의 세대는 알고 있다. 지난날의 버스안내양들이 결코 그렇지 않았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녀들은 대부분 키가 작고 밝은 표정이 아니었으며, 승객들에게 반말을 듣기가 일쑤였다.

버스안내양에 관해 필자가 책에 발표한 글이 있어 여기에 다시 가져와 보기로 한다.

1977년 11월 22일 ‘안내양 솜씨자랑 바자회’에 참석한 박근혜씨.

“버스안내양 복지향상 자금을 지원하라”

1960~70년대에 늘 대중과 함께 움직이는 도시의 억척스런 생활인이 버스안내양이었다. 대부분 돈 한번 벌어 잘살아 보겠다고 시골에서 도시로 나온 처녀들이었다.

1962년 11월, 서울 시내버스 26개 노선에 근무하는 안내양 213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에 의하면 대부분 18세 전후의 나이에, 초등학교를 나온 뒤 할 일이 없어 버스안내양이 되었다고 했다. 그들의 하루 노동시간은 18시간이었고, 하루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4~5시간, 식사시간은 1시간에 불과했다.

승용차가 흔치 않은 시절이라 출퇴근 시간의 버스는 늘 콩나물 시루였고, 안내양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려고 안간힘을 썼다. 버스 승객들은 안내양들에게 하녀 대하듯이 막말하기가 일쑤였고,
버스 노선을 돌고 오면 요금을 훔치는 ‘삥땅’을 의심한 몸수색도 당연시되었다.

만원버스에 손님을 태우다 밖으로 굴러떨어져 크게 다치는 일도 있었고, 대학생의 꼬임에 넘어가 실패한 사랑의 아픔도 있었다. 그리고 회사측의 지나친 몸수색에 항의해 자결하는 사건도 있었다.

1977년 11월, 대통령의 딸 박근혜가 서울시내 버스안내양들의 바자에 갔다. 안내양들의 복지에 써달라는 대통령의 보조금을 전달하고, 안내양들이 만든 수예와 편물 작품을 관람했다.

딸에게 안내양들의 이야기를 들은 대통령 박정희는 서울시내 91개 버스회사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를 실시했다.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과 감사원으로 구성된 조사반이 1만여명 버스양내양들의 합숙소, 식당, 침실, 침구 등 후생복지 시설과 근로 조건을 조사한 결과, 상당수 업체가 시설이 불비할 뿐 아니라 근무조건이 열악하다는 보고였다.

박정희는 교통부장관과 서울시장, 노동청장을 불러 시설이 나쁜 버스업체들은 조속히 개선해서 안내양들의 근무에 불편이 없도록 복지 향상에 힘쓰도록 권장하라고 지시하면서, 시설 개선에 필요한 자금의 부족한 업체에는 특별 자금을 지원하라고 했다.

아울러 이렇게 말했다.

“일부 지각없는 시민들이 버스안내양들에게 폭언이나 폭행을 하는 일이 없도록 계몽지도하여 법에 어긋나는 행위가 있을 때는 엄중 조치하시오.”

대통령이 직접 디자인을 고른 안내양 방한복

그가 딸 박근혜에게 또 들은 말이 있다.

“겨울이라 매우 추워 해요. 따뜻한 옷을 입혔으면…….”
“음, 방한복을 해주어야겠구만. 역시 소녀들이니까 모양나게 입어야겠지?”

그는 직접 모자가 달린 방한복의 디자인을 고르고, 그대로 만들어 달라고 제조업체에 일을 맡겼다. 그렇게 만들어진 방한복 상하 한벌씩을 서울시내 버스안내양 1만여명에게 보내주고 그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이듬해 1978년 1월 연두 기자회견에서 새해 정부 시책과 특별히 당부하고 싶은 말을 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버스안내양 이야기를 했다.

“요즘 서울에는 교통 사정이 대단히 나쁘고 버스 한번 타기가 대단히 힘이 든다고 합니다. 불편하고 혼잡해서 버스를 타면 짜증이 나고 신경질이 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버스에 근무하는 안내양들에게 큰 소리를 친다든지, 거친 말을 쓴다든지 때로는 욕설을 한다든지 그런 점잖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은 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버스가 혼잡하고 불편한 것이 결코 안내양들의 책임이 아닙니다. 책임이 있다면 버스 회사에 책임이 있고, 더 위로 추궁을 하면 서울시에 책임이 있고, 또 더 추궁하면 정부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버스가 혼잡한 것이 안내양에게 무슨 책임이 있으며, 왜 안내양들에게 화풀이하고 짜증을 내고, 신경질을 내고 큰 소리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버스를 이용하는 시민들도 그들을 남처럼 생각지 말고 내 딸이나 내 누이동생이 저런 직장에 나가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종일 고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불편하고 짜증이 나더라도 절대로 신경질을 부리지 않고 거친 말도 쓰지 않겠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소녀들의 여러가지 딱한 사정을 잘 이해하고 아량을 가지고, 버스에서 서로 고운 말은 주고받고 서로 웃음을 주고받고, 또 노약자들이 들어오면 아무리 복잡한 속에서도 서로 자리를 양보하는 이런 인정이 오고 가는 명랑한 버스, 그런 버스를 타면 훨씬 편리하고 버스도 빨리 갈 것이며, 다소 복잡하더라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1977년 12월 19일 구자춘 서울시장이 대통령이 직접 디자인을 고른 방한복을 버스안내양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이어서 그해 2월에는 버스안내양의 방한복을 무료로 납품해준 제조업체 사장(권태흥)에게 편지를 보내 “가정형편이 허락하지 않아 상급학교에 진학도 못하고 직업전선에 나와서 고된 일을 하면서 국민에게 봉사하고 있는 소녀들을 위로하고 격려할까 하는 뜻에서 방한 코트 제작을 의뢰했던 것인데 방한 바지를 함께 제작해 무료로 납품을 해주어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했다.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안내양에게 막말하는 건 더 큰 인권침해다”

대통령 박정희는 민생 부분에서 가장 주목한 것이 버스안내양들의 문제였다.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기도 했지만, 그는 특히 안내양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막말을 하는 현실에 상당히 화를 냈다.

“버스안내양들의 대부분이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중퇴했고 불우한 가정의 처녀들인데 이들의 처우도 좋지 않으니 이들이 의욕을 갖고 친절히 일하도록 배려해야 한다. 넥타이 매고 버젓한 신사들이 이들 불우한 안내양들에게 따뜻하고 부드럽게 얘기하지 않고 상스럽게 얘기들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옷 잘 입고 잘 먹고 좋은 차를 타야 신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인격이 갖춰져야 신사다. 국법을 어긴 사람들을 법에 의해 처벌을 하면 인권침해가 아니냐면서 굉장히 떠드는 사람들이 안내양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고 과격한 말을 쓰는 등 천시하는데 이것이 훨씬 큰 인권침해다.”

그는 분노의 말을 자주 했다.

버스의 남자 차장들이 여성들로 교체되어 버스안내양이 처음 등장한 것은 5.16혁명 직후였다. 근대화시대와 함께 출발한 버스안내양들은 대부분 옷이나 화장품 구입 등 여성으로서의 당연한 소비 욕구를 억제하면서 돈을 고향집에 보내 송아지도 사서 키우게 하고 남동생 학비를 대주면서 억척스럽게 살았다.

이후 그들에게도 경제성장에 따른 면학과 취업 등의 확대된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적 변화가 오고 1980년대에 자동문과 요금함이 달린 자율버스가 등장함으로써 그들은 버스를 떠났다.

그들은 근대화시대와 함께 땀을 흘린 역동적인 민생의 구성원이었다. 기억되어야 할 헌신적인 누이들이다.

이상은 필자의 졸저 <박정희 일화에서 신화까지>에 수록된 내용이다.

‘독재자’ 소리에 항변하던 버스안내양

박정희 시대의 언론인들이 전하는 말이 있다. 기자들이 청와대에 출입을 하기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어용’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언론사가 ‘어용’을 불어들이고 삐딱하고 가시 돋친 기자를 새로 보내도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모양으로 변해 은근한 고민거리였다고 한다. 과장된 면이 있긴 하겠으나, ‘어용기자’로 변하게 되는, 갑론을박 없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그 원인을 들어보면 자못 흥미롭다.

1978년 12월 22일에는 대통령이 보낸 선물이 전북여객에 전달되었다.

“박정희와 두세번 밥을 먹거나 막걸리를 마시면 그에게 빠져들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것이다.

이 말의 증인이라 할 사람 중에 후쿠다 쓰네아리(福田恒存)라는 일본의 시사평론가가 있다. 그는 대통령 박정희를 “정치가로서, 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존경한다”고 했다. 대통령을 세번 면담했던 그가 네번째의 만남을 약속받고 서울에 온 것이 1979년 10월 26일이었다. 네번째의 면담은 불가능했지만, 대신 그는 대통령 박정희가 18년 통치를 돌발적으로 마감하고 역사로 돌아간 국장(國葬) 기간의 한국인들 표정을 생생하게 살필 수가 있었다.

분향소에 장사진을 이룬 사람들의 침통한 표정을 그는 보았고, 교통정리를 하던 경찰도 눈물을 닦는 것을 보았다. 길거리에서 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가 호텔에서 본 TV는 생전의 대통령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그때 방을 청소하던 여종업원이 울음을 터뜨리고는 “다시 오겠습니다”라며 방을 뛰쳐나가더라고 했다.

그는 일본 안보에 관한 취재를 위해 판문점에 다녀왔는데, 그가 탄 버스가 중앙청 앞에 이르렀을 때 안내양이 세종로 거리를 메운 분향 행렬을 가리키며 국민이 대통령에 대하여 얼마나 ‘경애의 정’을 갖고 있는지를 설명했다. 이에 대해 그가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독재자라고 합니다”라고 말하니 대뜸 안내양이 언성을 높이며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틀린 것입니다”라고 덤벼들더라고 했다.

버스안내양이 그토록 항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박정희는 ‘서민 대통령’으로 불린다. 그가 지휘한 국가경영의 중심 목표에 자리매김된 파트너가 서민대중이었다. 당연히 버스안내양들도 빠질 수 없는 서민층의 구성원이었고, 그들은 박정희 시대로부터 중산층으로 진입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탄탄한 중산층의 형성을 통치 18년의 결과로 남겨놓았다.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사실이다. 중산층은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다. 누구나 수긍하는 정치 경험론이다. 그렇다면 그가 민주주의의 골격을 만들어 정치발전의 새 판을 준비해 놓은 사실을 부정할 수가 있을까. 그럼에도 그는 안티 세력에게 독재자로 각인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안티 세력은 통치 18년의 과정을 비판하는 것이다.

대통령 박정희는 “나 아니면 안된다”는 독선과 뚝심의 소유자였다. 야당 지도자들은 자기만 대통령을 해먹겠다는 발상이라며 그것이 바로 독재라고 했다. 사고방식과 리더십의 성격과 지도자의 유형이 달랐다. 박정희는 달랐다. 대통령은 누구라도 할 수 있지만 “나 아니면 안되는 일이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박정희 시대 18년의 성과를 배경으로 그 중심에 박정희가 아닌 최규하로부터 노무현, 이명박까지를 일일이 대입해 보자. 박정희가 아닌 누구라도 그 성과의 중심에 들어갈 수가 있을까. 박정희가 아니라도 그만한 업적을 남겼으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구촌 구성 국가 중에 맨꽁무니에 붙어 있던 나라를 일으키는 데는 국민 에너지를 폭발시킨 뚝심의 카리스마가 있었고, 서민대중의 땀과 눈물이 있었고, 정치 억압의 비상 수단이 필요악으로 동원되었다. 대한민국의 눈부신 환골탈태는 그렇게 이루어졌고, 그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독재자라는 소리에 버스안내양은 항변했다. 그것이 바로 서민대중의 생각이고, 그래서 어느 정치인들의 번지르르한 말보다 진솔하고 울림이 큰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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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모임(http://www.516.or.kr/)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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