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한 삼성人①] '도쿄 선언' 다시 꺼내 든 이재용의 호통…AI 바람 올라탈까
입력 2025.03.18 15:33
수정 2025.03.18 16:36
이례적인 고강도 발언... 죽기 살기 '사즉생(死則生)' 언급
줄곧 언급돼온 '위기론'에 처음으로 정면돌파했다는 관측
메모리·파운드리 모두 어려운데... '주52시간'까지 발목
19일 정기 주주총회, 주요 경영진 '위기 극복 청사진' 주목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1년간 줄곧 언급돼왔던 '삼성 위기론'을 두고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에 본격 진출하는 토대를 마련했던 이병철 창업 회장의 '도쿄 선언'을 다시 한번 꺼내들었다. 삼성전자가 30년간 메모리 반도체 왕좌를 지켜왔지만 최근 AI 주도권을 놓치며 근래 반도체 50년사에서 가장 큰 위기를 마주한 탓이다.
이 회장은 경영진의 철저한 반성을 촉구하면서 자사 제품의 '삼성답지 못함'을 언급했다. 동시에 '사즉생(死則生)'을 언급하며 "죽느냐 사느냐 생존 문제에 직면했다. 철저히 반성하고 과감히 행동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간 사법리스크에 발에 묶여 제대로 된 수장으로서의 메시지를 내놓지 못했던 것과 달리 제대로 쓴소리를 낸 것이다.
18일 삼성전자 및 업계에 따르면, 이재용 회장은 최근 임원 대상 세미나에서 이례적으로 강도 높은 위기 메시지를 던졌다. 사업부별 문제를 조목조목 짚으며 '죽기 살기'를 언급했다. 삼성은 현재 전 계열사 임원 2000여명을 대상으로 이달 말까지 교육을 진행 중이다. 이 회장은 영상 메시지 형식으로 당부의 말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1999년 다우지수를 구성했던 기업들 중 24곳이 사라졌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도 잊혀질 것"이라고 위기감을 드러냈다. 또한 "경영진부터 철저히 반성하고 사즉생 각오로 과감히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경영진 쇄신을 위해 수시 인사를 도입하겠다고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이 회장이 지난해 말 부당합병·회계부정 혐의 2심 공판 최후진술에서 "최근 들어 삼성의 미래에 대한 우려가 매우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한 것에 이어 이번에 '사즉생'을 언급한 이유는 그만큼 현재 삼성이 기업의 생존을 걱정해야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삼성그룹 최전선에 있는 삼성전자의 주력 핵심 사업은 반도체다. 이를 의식한듯 이재용 회장은 영상 메시지에서 "메모리 사업은 자만에 빠져 AI(인공지능) 시대에 대처하지 못했다. 파운드리(위탁생산)은 기술 부족으로 가동률이 저조하다"고 각 사업부를 언급하며 강도 높은 질책을 이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사업 전반의 경쟁력 하락을 지적한 것이다.
실제로 삼성전자 경쟁력은 하락하고 있다. 그를 '5만 전자' 주가가 뒷받침한다. 메모리 반도체 글로벌 1위 최강자였던 삼성이 국내 경쟁사인 SK하이닉스에 밀리는 시간은 채 2년이 걸리지 않았다. '당장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AI 반도체 솔루션인 HBM(고대역폭메모리) 관련 조직을 축소하고 개발을 중단한 탓이다.
아울러 "2030년까지 세계 1위가 되겠다"고 야심차게 시작한 파운드리 사업에선 역설적으로 점차 1위 대만 TSMC와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삼성 파운드리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8.1%다. 전기 대비 1%p 감소했고, 전년도인 2023년 4분기와 비교하면 3.2%p 하락했다.
반면 업계 선두를 달리는 TSMC는 꾸준히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다. 2023년 4분기에는 61.2%였다가 지난해 4분기에는 67.1%로 상승했다. TSMC와 삼성전자의 점유율 격차는 2023년 4분기 49.9%p에서 지난해 4분기 59.0%p로 10%p 가까이 벌어졌다. 파운드리 뿐 아니라 칩 설계를 맡는 시스템LSI 부문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기준 글로벌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시장에서 삼성 시스템LSI이 주력인 엑시노스 점유율은 5% 남짓이다. 자사 갤럭시 시리즈에도 탑재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 출시된 삼성 갤럭시S25 시리즈엔 엑시노스 대신 퀄컴 스냅드래곤 AP가 채택됐다.
범용(레거시) 메모리 부진도 실적 악화에 한몫하고 있다. 중국 YMTC 등이 중저가 D램을 시장에 공급하면서 가격 경쟁을 벌이고 있는 탓이다. 최근 상대적으로 저사양 메모리 수요가 증가하고 있어 가격 회복 효과가 나타나곤 있지만, 중국이 저가 반도체 공세를 펼치는 상황에서 그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최근 회사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D램 시장 점유율은 2023년 42.2%에서 지난해 41.5%로 하락했다. 스마트폰은 19.7%에서 18.3%로, TV는 30.1%에서 28.3%로 내려앉았다.
'주52시간'으로 반도체 연구개발이 발목이 잡힌 것도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경쟁력 향상을 방해하는 요인이다. 다만 고용노동부가 반도체 연구개발 직종에 대해 특별연장근로 인가 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확대하긴 했으나 보다 근본적인 반도체특별법은 야당인 민주당의 반대로 여전히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엔 창사 이래 첫 파업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재용 회장의 이례적은 고강도 발언은, 과거 1993년 이건희 선대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떠올리게 하는 모먼트다. 이건희 회장 역시 회장 취임 6년 만에 임원들을 소집해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고강도 개혁을 주문한 바 있다. 지난 2020년 이건희 선대회장의 별세 후에도, 2022년 회장 취임 당시에도 별도 취임사를 내놓지 않았던 이재용 회장의 과거 행보를 감안하면, 이번 발언은 상당히 이례적이라는 평이다.
한편 삼성은 지난해 연말 정기 인사를 통해 삼성글로벌리서치 산하에 경영진단실을 신설했다. 그룹 전반에 대한 쇄신을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또한 오는 19일엔 삼성전자 정기 주주총회가 예정돼 있다. 안팎의 위기감이 고조되는 만큼 주총에도 관심이 집중되는 모습이다.
이재용 회장이 주총에서 메시지를 내지 않은 것은 수년 째지만 위기론에 대한 업계와 주주들의 관심도가 높은 만큼 하루 앞으로 다가온 삼성 주총에서 반도체 사업 수장인 전영현 부회장(DS부문장), 한종희 부회장(DX 부문장) 등 주요 경영진이 직접 위기 극복 청사진을 제시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나온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주총 때 처음 도입한 '주주와의 대화'를 올해도 운영한다. 주요 경영진이 주주의 질문에 직접 답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