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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의 후폭풍… ´군대정풍운동과 국가보안법´


입력 2009.02.11 16:29
수정

<기획보도> ´여순(麗順)은 반란이다´<10>

살아남은 반란군은 빨치산으로 변신후 북한의 남침으로 재등장

인민재판 학살과 우익의 보복이라는 구조적 적대감이 오늘의 ´한(恨)국´


10월 27일 여수 탈환

여수에 있는 반란군은 광양을 거쳐 백운산으로 도망쳤다. 지창수 등 일부는 벌교로 도망쳤고, 남로당 무장세력 1천여 명과 동조세력 1200여 명이 여수를 지키고 있었다. 역시 순천과 마찬가지로 반란군의 후퇴를 지원하기 위해 남겨진 불쌍한 엄호세력들이었다.

10월 26일 아침6시, 진압군 12연대, 3연대,2연대, 장갑부대, 5연대 1개 대대가 여수로 진격하고, 여수항에서 다른 부대가 상륙 협공하기로 하고 진격해 들어갔다. 장갑부대가 선발부대가 되어 전진하고, 12연대가 동쪽, 3연대는 200고지와 종고산, 2연대는 여수 서부를 담당 공격하였으나 반란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진압군은 고지에서 여수 시내를 향해 81밀리 박격포로 위협사격을 하였다.

백인엽 소령이 장갑차를 타고 선두에 서서 여수 시내를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여수는 순천과 달리 저항이 의외로 강하였다. 반란군은 보이지 않고 젊은 학생들이 99식 소총을 가지고 저항하고 있었다. 27일 오후 3시 30분, 진압군은 하루 종일 시가전을 해서 여수를 완전히 탈환하였다.

이 틈에 반란군은 백운산에서 지리산 화엄사 옆 문수골로 진압군의 방해 없이 들어갔고, 여수 시내에서는 (20일부터 인민공화국 세상이 되어 26일까지 숨어 있던) 국군, 경찰, 우익들이 만세를 부르며 나왔다. 7일 동안 우익이 죽는 세상에서 이제는 좌익이 죽는 세상이 되었다.

불과 일주일을 점령하기 위해 수많은 동포를 죽이고, 끝내 자신들도 사살당하는 이 우매함. 우리 민족사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한(恨)의 강은 이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Ⅳ.토벌(討伐), 그 이후

반란군이 지리산으로 도망쳤다는 정보를 입수한 12연대는 구례에 집결하였다. 10월29일 아침6시, 12연대 2대대와 3대대는 구례 화엄사에 도착하여 계곡과 능선을 따라 1,500미터 노고단까지 산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29일~31일 3일을 밤낮으로 반란군을 추격하였다. 그러나 어디에 숨었는지 반란군은 흔적조차 없었다. 적어도 천 명 정도는 지리산으로 도망쳤을 것이었다.

여수와 순천 지역의 어린 학생들과 지역 좌익들을 희생물로 남기고 도망친 반란군은 모두 화엄사 문수골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백인엽의 끈질긴 토벌작전으로 김지회는 도망치고 있었다.

그러나 겨울이 끝나던 4월 4일, 한웅진 대위가 인솔하는 진압군과 거창 개관산 전투를 끝으로, 1949년 4월 9일 산내면 반선리 어느 선술집에서 마지막 술과 밥을 얻어먹다가 사살 당한다. 48년 10월 19일 반란을 일으킨 지 약 6개월만의 일이었다. 지창수는 이미 벌교 전투에서 죽었다.

결국 나머지 반란군들도 처절하게 토벌되고, 광주도림병원 간호사 출신 김지회의 애인 조경순도 죽었다. 그녀는 제주도 출신으로 남로당 군사부장 이재복의 레포로 김지회와 접촉하다가 애인관계로 발전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반란군들은 전남 전 지역에 걸쳐 군 지역 좌익들의 도움을 받아 퍼져나갔다. 심지어 순천 여수와는 거리가 먼 서해안까지, 영광 고창 지역까지 이들 반란군들이 출몰하였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원한을 쌓았는지 모른다. 전쟁 전까지 그들은 ‘산사람’으로 불리우면서 살아남아 있다가 인민군의 남침에 따라 다시 등장한다.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 모른다.

장흥 유치와 가까운 영암이 약 8000여명, 그리고 영광, 고창 지역 학살이 7000여 명이었으니, 기타 목포, 무안, 화순, 장성, 담양 등 섬 지역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에서 발생한 좌익들의 학살은 그 잔인함뿐만 아니라 학살자 수에 있어서도 전남이 가장 많았다. 전남이 그토록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은 모두 이 여순반란사건의 결과였다.

그러나 14연대 반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박헌영은 14연대 반란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국군 내부의 좌익들을 조종하여 연속적인 반란을 일으킨다. 이어 광주 4연대가 반란에 동참하고 토벌되어 4연대는 해체되고 만다.

대구 6연대도 48년 7월 10일 반란에 가담한다. 6연대의 1차 반란은 곧 진압되어 40여 명이 다부동 쪽으로 도망쳤다. 48년 12월 6일 하사관 중심의 잔여 좌익들이 2차, 3차 반란을 일으켰다 토벌되고, 6연대는 해체된다.

이어 군대 내부의 심각한 상황을 보고 이승만 정부는 군대 정풍운동을 벌여 좌익들을 숙청한다. 48년 12월 20일 드디어 국가보안법이 공포된다. 정풍운동과 보안법이 시행되자, 이에 못 견딘 춘천 8연대 2개 대대가 부대원 전부를 이끌고 월북하였다.

마치 베트남 패망의 징후(徵候)를 보고 있다 할 것이다. 그 베트남보다 30여 년 전에 한반도에 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종합되어 승산을 판단한 김일성은 6.25를 일으켰다.

여순사건의 안타까운 죽음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 있어

여순반란사건은 군대 정풍운동과 국가보안법 제정을 촉발시킨 반란이었다. 만약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군대 정풍운동은 없었을 것이고, 군대 정풍 운동이 없었다면 국군은 모두 ‘붉은 군대’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6.25. 북한의 남침과 국군의 호응이 예상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여순반란사건의 결과로 인해 우리는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좌익의 인민재판 학살과 우익의 보복이라는 구조적 적대감이 48년 10월부터 50년 6.25일까지 무려 2년여를 지속한 결과, 우리 민족은 용서와 화해의 기회를 잃었다. 전쟁 후에도 북의 끊임없는 침략도발이 있었고, 우리는 좌익의 후예들에게 연좌제를 씌웠다. 그리고 한(恨)을 지속시켜 나갔다.

오늘날 대(代)를 이어가는 민노당 중심의 좌익들을 볼 것이다. 2대, 3대를 이어가는 좌익 집안의 내력을 보면서, 다시 회한에 잠긴다. 북은 도발과 침략을 멈추지 않고, 대한민국 내 좌익들은 대(代)를 이어 북을 추종하고 있는 현실. 용서와 화해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대(代)를 끊을 것인가.

소설 태백산맥의 ‘염상진’이라는 인물의 행로가 바로 이 ‘여순반란사건’으로부터 전개된다는 것은 만천하가 아는 사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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