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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8되만 마신다네”


입력 2009.02.04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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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범의 음주고사>죽림칠현④, 산도(山濤)

산도는 지금까지 본 죽림칠현의 인물과는 조금 다른 일면을 가진다. 죽림칠현 중에서 나이도 가장 많을 뿐 아니라 관직도 가장 높은 곳에 오른 인물이다.

혹 여기서 앞의 혜강(&23879康)편에서 언급한 ‘거원에게 주는 절교하고자하는 편지(與巨源絶交書)’를 떠올린 이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친구 혜강이 보낸 이 한 통의 편지로 인해, 두고두고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산도다.

정말 산도가 사마씨의 앞잡이가 되어 혜강을 죽음의 마수에 걸려들게 한 것일까? 또한 그가 죽림에 들어간 것이 오로지 관직에 나간 방편으로 삼은 것일까?

산도는 자신의 인품에 오점이 될 수 있는 이 일에 대해 끝까지 일언반구의 해명도 하지 않았기에 의문을 해소할 길이 없다. 그런데 필자는 이러한 대응이 참으로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현세의 우리는 조금만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해명을 못해서 안달이다. 어쩌면 우리는 말이 너무 많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산도의 입장을 한 번 생각해보자.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비난을 받을 때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겠는가?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가 아무리 해명을 해도 상대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다만 친구를 위하고자 했든 참된 마음 하나만을 끝까지 유지하면 되는 것 아닌가?

애초에 정말 순수하게 친구를 위해서 관직을 권했다면 말이다. 결과적으로 산도는 혜강이 죽은 뒤 20여년 뒤에, 그의 아들 혜소(&23879紹)를 천거하여 비서승(秘書丞)으로 삼았다. 이쯤 되면 그의 진심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여간에 산도가 의심을 받는 것은 사마씨와의 인척관계 때문이다. 즉, 산도의 부친 산요(山曜)의 고모가 張汪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의 딸 張春華가 사마의(司馬懿)의 정실부인(正室夫人: 사마사와 사마소의 친모)이 된 것이다.

또한 산도는 조씨의 조상(曹爽)과 사마씨가 정권을 다툴 때는 죽림에 들어왔다가 사마씨가 정권을 잡을 무렵, 즉 그의 나이 40이 훨씬 넘어서야 제대로 된 관직(그전에도 낮은 관직에 나간 적이 있음)에 나가게 된 것도 그의 인품을 의심하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다.

이를 뒷받침하는 고사가 하나 전한다.

<진서(晋書)> 본전(本傳)에 의하면, 산도가 벼슬자리도 없을 때 집안이 가난하였기에 처(韓氏)가 항상 원망스런 말을 하면, 산도는 “잠깐 배고픔과 추위를 참으면 내가 뒤에 삼공(三公: 지금의 재상과 같음)이 될 텐데, 그러면 당신은 삼공의 부인이 되는 것이 아니겠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 또한 그가 정말 재상이 되기 위해 안달을 한 것인지, 잠시 부인의 원망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무마용으로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필자는 산도의 인품을 믿고 싶다.

<진서>본전에서 또한 산도는 “본성이 老莊을 좋아하여 늘 몸을 감추고 스스로 숨었다”고 했고, <세설신어(世說新語)>의 기록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산도를 “이 사람은 처음 담론에 스스로를 두지 않으려고 하여서 老莊을 읽지 않았지만 항상 그가 읊조리는 말을 들으면 종종 노장의 요지와 부합했다.”고 평가하였다.

이 기록도 약간의 의문점을 제공한다. 이를테면 그가 관직에 나가려는 의미로 유가의 공부를 했지만 본성이 노장과 부합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나아가 또 <세설신어>의 기록을 보면, 산도가 처음 죽림의 모임에 들어가서 혜강과 완적을 만나고 나서 너무나 그의 인품과 재능에 반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의 처에게 “나는 단지 저 두 사람만을 친구로 삼을 뿐이네”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의 처가 “저들의 재주와 지혜가 당신보다 훨씬 뛰어나니 당신은 다만 도량(度量)으로 그들과 교유하십시오”라고 권하자, 산도가 즉각 “그들도 나를 도량이 뛰어나다고 여긴다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산도의 재능과 도량을 엿볼 수가 있다. 산도는 그의 시문집 5권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글씨에서 草書에 뛰어나다고 하지만 단지 이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혜강과 완적은 어떤가? 글씨면 글씨, 음악이면 음악, 시문이면 시문,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이들과 함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필자가 느끼기에는 <세설신어>에서 말한 그의 도량(度量)이라고 여긴다.

이 도량이 곧 산도를 재상까지 이르게 한 근원이 아니었을까? 죽림칠현 중 사실상 관직에 대한 꿈을 지니고 죽림에 참가한 왕융(王戎)이 가장 존경한 인물이 산도라고 한 것을 보면, 그의 도량과 인품을 대략 추측해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산도는 천성적으로 노장과 가깝다고 하더라도 행동거지가 원칙론자였음을 미루어 알 수 있는데, 이런 사람이 관계(官界)에서는 적격일 수가 있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몇 가지 고사가 전한다.

첫째, <세설신어>을 보면, 왕융이 그를 “마치 다듬지 않은 옥과 물이 뚝뚝 떨어지는 사금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그 보물을 흠모하지만 그가 유명한 기물임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둘째. 또한 그가 상서이부랑(尙書吏部郞)으로 있을 때 모친상을 당했는데, 그가 보인 태도는 혜강이나 완적의 행동과는 전혀 달랐다.

전하기를, 산도는 모친이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각 휴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얼굴이 초췌하고 병이 심한 모친을 보고 산도는 실성하여 통곡했다.

그리하여 온종일 모친의 신변을 지키고 탕약을 끓이고, 모친에게 지어드린 밥도 친히 간을 보았다. <진서>본전에 의하면, 모친이 돌아가신 뒤에 산도는 비록 “나이가 이순이 넘었지만,……여전히 거상(居喪)의 예를 다하고, 흙을 날라다 무덤을 만들고 손수 송백(송백)을 심었다” 그리고 무덤가에 여막을 지어서 상례를 치렀다.

셋째. 관직에 있을 때, 진군(陳郡)사람 원의(袁毅)가 격현(&39730縣)의 현령이었는데, 법을 어기고 공경에게 뇌물을 주면서 명성을 얻으려고 하여, 산도에게도 뇌물로 비단 백 근을 주었다.

산도는 선물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이를 받아서 다락에 저장해 놓았다. 뒤에 원의(袁毅)의 일이 발각되어 산도까지 조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가 처음 받아서 봉인해 놓은 그대로 비단 위에 먼지가 두껍게 앉아있는 것을 보고, 조사하던 상관이 감탄했다는 고사가 있다.

넷째. 산도는 술을 좋아하여 술을 마시면 8斗를 마셔야 비로소 취했다.

황제가 8斗를 주고 마시게 하고선 아무도 몰래 술을 약간 더 보탰다. 그런데 산도는 정량만을 마시고서 그만 두었다고 한다.

위의 고사를 종합하면, 산도는 굉장히 올곧게 산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술을 마실 때도 자신의 양을 정해놓고 그 이상 마시지 않는 절제는 누구나 쉽게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술로 인한 에피소드를 서너 개씩은 다들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도의 경우를 통해 그의 음주습관을 다시 생각해보자. 친구 혜강과 관계로 인해 오점을 남긴 사람이 술로 인해 또 다른 주사를 하거나 술기운을 빌어 횡설수설 자신을 변명해본들 자신만 얼마나 초라할 것인가?

8斗의 술로 자신을 다독인 산도를 생각해 볼 일이다.

1斗로 세상을 원망하고, 1斗로 친구에게 용서를 빌고, 1斗로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1斗로 울음을 삼키고, 1斗로 더욱 분발하고, 1斗로 우의를 다짐하고, 1斗로 죽림을 그리워하고, 1斗로 하늘을 쳐다봤을 것 같은 산도를 생각해 볼 일이다.

술이 목으로 넘어간 뒤에 징그럽게도 말이 스물스물 자꾸 나와서는 안될 일이다. 나오려는 말들을 목구멍으로 넘어간 술과 함께 말끔히 안으로 안으로 구겨 넣어야 할 일이다. 그리고선 묵묵히 다시 돌아보자. 잠시 자신을 돌아보면 많은 부분 자신에게 잘못이 있음을 그제서야 깨닫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산도가 촉중(蜀中)의 비현(&37099縣)의 현령일 때, 커다란 대나무를 가르고 술을 빚어서 술을 만들었는데, 그 향기가 백보 밖에서도 맡을 수가 있었기에 ‘비통주(&37099筒酒)’라 하였다고 한다. 아마 유명한 중국의 ‘죽엽청주(竹葉淸酒)’가 이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또한 그의 아들 산간(山簡)도 ‘취도산공(醉倒山公)’·‘산공도재(山公倒載)’·‘산간취(山&31616醉)’·‘산옹취(山翁醉)’·‘산공마(山公馬)’·‘습지음(習池飮)’·‘취습원(醉習園)’ 등의 고사로 유명하며, 이백(李白)의 <양양가(襄陽歌)> 속에서도 ‘(술에 취해)흰모자를 거꾸로 쓰고(倒着接&17254)’ 돌아왔다라고 하여 더욱 유명한 술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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