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반도체 D램 덤핑 공습’에 나섰다
입력 2024.12.15 07:07
수정 2024.12.15 07:07
11월 DDR4 가격 전달보다 20.6%↓…7월보다 35.7% 곤두박질
경기침체 장기화, 스마트폰·PC 등 IT 수요 부진 어려운 와중에
설비투자 늘린 中업체들, 공급과잉 불러 공격적 덤핑공세 나서
반값 공세 ‘주범’ 창신춘추, 美 정부의 거래제한 명단서도 빠져
중국 최대 메모리 반도체 업체인 창신춘추(長鑫存儲·CXMT)가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미국의 대중 수출통제 강화 속에 창신춘추가 D램 제품을 반값에 무더기로 쏟아내는 바람에 ‘덤핑 주범’으로 지목된 것이다.
대만 시장조사 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지난 11월 레거시(범용) 메모리인 DDR4 8Gb 가격은 전달보다 20.6% 내린 1.35달러를 기록했다. 지난 7월 2.10달러에서 불과 넉달 새 35,7%나 곤두박질치며 지난해 9월(1.30달러) 이후 1년 2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주저앉았다.
중국 반도체 기업의 반값 공세 충격은 DDR4뿐만 아니다. 상대적으로 견고한 수요층을 형성해 온 최신 제품인 DDR5 가격도 강한 하방 압박을 받고 있다. 11월 PC용 DDR5 16Gb 제품의 평균 고정거래 가격은 3.90달러로 전달(4.05달러)보다 3.7% 하락했다. 7월 4.65달러와 비교하면 16.1% 떨어졌다.
DDR5와 같은 최신 제품은 통상적으로 가격이 변동폭이 크지 않은데, 중국 반도체 기업들이 덤핑 공세를 펴면서 가격이 수직낙하고 있는 것이다.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창신춘추가 DDR4 생산능력을 공격적으로 확장하고 있다”며 “공급 증가 압력이 DDR4에서 DDR5로도 확대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2022년 중반 시작된 반도체 불황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풀리기 시작하며 D램 가격도 1년 6개월 간 하락했다. 글로벌 메모리 업체들의 감산 효과와 재고 소진 등에 힘입어 업황이 가까스로 회복하면서 지난해 10월부터 다시 반등세를 탔다. 하지만 경기침체가 장기화하고 스마트폰과 PC 등 정보기술(IT) 수요 부진이 이어지자 10개월 만인 올해 8월부터 상승세가 꺾였다.
이런 와중에 그간 설비투자를 적극적으로 늘려온 중국 업체들의 D램 저가 판매 공세에 나서면서 공급과잉을 불러 D램 가격이 속절없이 추락했다. 창신춘추와 푸젠진화(福建晉華·JHICC)는 DDR4 8Gb D램을 시중 가격의 절반 수준인 0.75~1달러에 내다팔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 설립된 신생 D램 업체인 창신춘추는 미국의 대중 반도체 제재가 시작된 2020년 이후 공격적으로 캐파(생산능력)를 확장하고 있다. 2020년 월평균 4만장(웨이퍼 기준) 수준이던 D램 생산능력은 베이징의 두 번째 공장이 가동되면서 올해 2분기에 16만장(글로벌 점유율 10%)으로 증가했다.
이 덕분에 대만의 D램 메모리 업체 난야커지(南亞科技)를 제치고 세계 4위로 올라섰다. 내년에는 40%가량 증가한 30만 장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내년 창신춘추의 글로벌 생산능력 비중이 15%를 넘어 3위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러지(33만 5000장·17%)를 위협할 것이라고 트렌드포스는 내다봤다.
창신춘추는 2016년 5월 중국 동중부 안후이(安徽)성 허페이(合肥)에서 설립됐다. 회장은 중국 칭화(淸華)대 물리학과 출신 주이밍(朱一明)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다. 그는 베이징의 팹리스(반도체 설계회사)인 자오이촹신(兆易創新·GigaDevice Semiconductor)라는 회사의 회장도 겸하고 있다.
미 유학(뉴욕주립대 석사)을 마친 주 회장이 현지 직장 생활을 접고 귀국해 자오이촹신을 창업한 것은 2005년이다. 미국 직장 경험과 탄탄한 기술 지식을 가진 그는 경영 수완도 뛰어났다. 수많은 반도체 설계회사 중 하나였던 자오이촹신을 이 분야 1·2위를 다투는 회사로 키웠다. 창업 10년 만에 증시 상장에도 성공했다.
상장으로 자금을 마련한 주 회장은 D램 시장 진출을 노렸다. 이즈음 중국 정부가 산업고도화 전략인 ‘중국 제조 2025’를 발표했다. 반도체 분야 대대적인 국가지원이 시작된 것이다. 주 회장의 D램 열망과 중국 정부의 반도체 자립 의지가 결합해 설립된 게 창신춘추다. 180억 위안(약 3조 5458억원)의 설립 자금 중 4분의 3은 허페이시가, 나머지는 자오이촹신이 댔다.
창신춘추는 민영기업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국유기업이다. 당초 허페이시가 갖고 있던 지분은 6차례 증자 과정을 거치면서 대부분 다른 국유펀드에 팔렸다. 중국이 반도체 산업육성을 위해 10년 동안 조성한 6870억 위안(약 135조원) 규모의 ‘중국 국가반도체산업 투자펀드’(빅펀드) 역시 창신춘추에 들어온 것이다.
올해 창신춘추의 주력 생산 D램은 17나노미터(㎚·10억 분의 1m)급이다. 전체 생산 제품의 53%를 차지한다. 지난해 주력 제품은 생산량의 87%를 차지했던 19나노급이다. 1년 만에 기술 업그레이드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내년에도 가파른 기술 변화가 예고돼 있다. 올 3분기부터 또 한번 기술을 개선해서 만든 16나노급을 초도 양산한 창신춘추는 내년 이 제품의 생산 비율을 33%까지 끌어올릴 방침이다.
창신춘추가 기술력을 급속히 높인 배경에는 ‘기술 훔치기’도 한몫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중국에서 반간첩법 위반 혐의로 구금 중인 전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출신 A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한국 수사당국 등에 따르면 A씨는 창신춘추에서 일했는데, 회사의 기술을 유출한 혐의로 체포돼 구금돼 있다.
A씨는 2016년 10월 창신춘추에 5년 계약으로 입사했다가 3년 6개월 만에 퇴사를 강요받고 쫓겨났다. 이후 기술 유출자로 낙인찍혀 귀국하지 못하고 인근 지역의 회사 3곳을 전전하며 일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기업들은 대체로 우리 기술자들을 영입한 후 창신춘추와 비슷한 방식으로 ‘단물을 빼먹고’ 퇴사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예컨대 이런 방식이다. 중국 기업들은 정년퇴직을 앞둔 한국의 고령 기술자들에게 접근해 우리나라에서 받는 연봉보다 2~10배 주겠다고 유혹해 이들을 데려간다. 이들 기술자로부터 우리 기업들이 가진 고유의 첨단기술들을 전수받아 활용한다. 또 이들에게 평소 잘 알고 있거나 한국 기업에 재직할 때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영입해 오도록 하는 방식으로 인재들도 빼갔다.
2~3년이 지나 이들 기술자의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면 그를 영업직으로 돌려 퇴사를 권고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중국어가 서툰 우리 기술자들로서는 중국 현지 시장에서 영업을 뛰라는 건 사실상 ‘나가라’는 말이나 다름없다"고 귀띔했다. 입사 초기에 약속했던 계약기간을 안 지킨 것은 물론 급여, 퇴직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나가는 이들도 많은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창신춘추는 미국 정부가 지난 2일 발표한 140개 중국 기업 규제 리스트에서 빠지는 ‘행운’도 따랐다. 미 상무부 산하 산업안보국(BIS)은 대중 첨단 반도체 및 반도체 장비 수출 관련 제재 대상과 품목이 확대된 새로운 규제를 발표했다. 중국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중신궈지(中芯國際·SMIC)와 최대 통신장비업체 화웨이(華爲)의 공급망에 해당하는 기업들에 대한 반도체 장비 및 고대역폭 메모리(HBM) 수출을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이 조치에 따라 중국 기업 140여개가 수출 제한 대상으로 추가됐다. 반도체 기업 20여곳과 반도체 장비업체 100여곳 등이다. 중국 최대 반도체 장비업체인 베이팡화촹(北方華創·NAURA)그룹도 수출제한 목록에 포함됐다. 그러나 창신춘추는 규제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 상무부의 조치에 대해 “(AI 가속기에 탑재되는) 구형 버전의 고대역폭 메모리(HBM)는 중국 기업이 계속 사용할 수 있다”며 “중국에서 가장 유력한 HBM 생산업체 중 하나인 창신춘추에 대한 장비 판매는 계속 허용하면서 중국으로의 HBM 및 AI 반도체 판매를 차단하는 것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창신춘추가 거래제한 명단에서 빠진 것은 미 반도체 기업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FT는 "중국 반도체 기업 의존도가 높은 미국 내 반도체 업체들이 미 의회 등을 대상으로 '제재 범위를 축소하라'는 로비를 벌여 왔고, 이 로비가 통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세계 3대 반도체 장비업체로 꼽히는 미 램리서치와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AMAT)는 그동안 중국의 대형 고객사를 잃으면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일방적인 대중 제재를 반대해 왔다.
글/ 김규환 국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