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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입가경 고려아연-영풍 경영권 분쟁…벤치클리어링에도 ‘룰’은 있다 [데스크 칼럼]

지봉철 기자 (Janus@dailian.co.kr)
입력 2024.10.04 17:58
수정 2024.10.04 20:02

75년 동업 두 가문간 지분 전쟁

경영 맡아온 최家, 지분 매집 불씨…장家, 공개매수 통한 지분 확보 맞불

형사 맞고소까지 난타전…하지만, 벤치클리어링에도 '지켜야 할 선' 있어

고려아연의 주요 주주 및 지분 구성. ⓒ데일리안 박진희 디자이너

야구를 기업 경영과 연결하는 건 흔하다. 야구와 기업 경영이 닮은 데가 많기 때문이다. 감독의 탁월한 리더십과 팀의 조직력, 선수 개개인의 피나는 노력과 희생, 면밀한 통계분석 등이 잘 조화를 이뤄야 하는 게 그렇다.


그래서 글로벌 기업들은 오래전부터 기업 경영을 야구에 빗대 설명해 왔다. 실제 미국 세인트폴 고등학교 재학 당시 동양인 최초로 야구팀 주장을 맡았던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은 야구의 속성을 기업 경영에 비유해 실질적 성과(득점)가 있어야 생존과 발전이 가능하고 조직의 팀워크(수비조직력, 팀플레이)에 위기관리 능력을 더해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야구 경영론'을 강조한 바 있다.


이렇게 우승이라는 목표를 향해 누구나 더 좋은 팀, 더 강한 팀을 만들려고 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충돌이 발생하기도 한다. 바로 '벤치클리어링'이다. 벤치클리어링은 그라운드로 선수들이 몰려나오는 것을 벤치(bench)를 깨끗하게 비웠다(clearing) 해서 붙여졌다. 불참한 선수는 벌금을 내야 하는 등 팀 단합을 보여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리고 관중들은 환호하기도 한다. 벤치클리어링을 야구의 일부라고 말하는 이유다.


벤치클리어링은 우발적으로 보이지만 대부분 이런저런 이유가 잠복해 있다. 폭발할 만한 이유와 사정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다. 투수의 고의적인 위협구, '배트 플립' 등의 과도한 세레모니, 큰 점수 차로 앞선 팀의 도루나 번트, 거친 태클 등이 그 예다. 때론 몇 경기 전, 심지어 몇 달 전 상황이 잊히지 않고 있다가 훗날 벤치클리어링으로 폭발하는 경우도 있다.


벤치클리어링이든 경영권 분쟁이든…"상대를 존중하라는 것"


최근 경영권 분쟁을 치르고 있는 고려아연과 영풍을 보고 있자니 야구의 벤치클리어링이 오버랩된다. 그간의 히스토리는 이렇다. 세계 1위 아연 제련 업체인 고려아연은 지난 1949년에 고(故) 장병희·최기호 창업주가 함께 세운 영풍그룹의 핵심 계열사다. 그룹 매출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캐시카우로서 그동안 소유는 장씨 일가, 경영은 최씨 일가가 도맡아 동업을 이어왔다.


그러나 지난해 창업주 3세 최윤범 회장이 취임한 이후 두 집안 간 기류가 달라졌다. 그동안 소유권 없이 경영을 맡아왔던 최씨 집안이 지난해부터 지분 매집에 나서면서 급기야 최대 주주 장형진 영풍 고문과 갈등을 초래했다.


최 회장과 장 고문 간 깊어진 갈등의 골은 올 초 고려아연 주주총회서 표면화됐다. 영풍은 고려아연이 상정한 주당 5000원 안건에 반대했지만, 참석 주주 62.74%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올 6월 서린상사 임시 주총에선 고려아연이 추천 인사 4명을 신규 사내이사로 선임하며 경영권을 확보했다. 영풍그룹 계열사인 서린상사는 고려아연과 영풍의 수출 판매와 물류 업무 등을 담당해왔으며 고려아연 측과 영풍 측이 보유한 지분이 각각 66.7%, 33.3%다.


결국 2014년부터 서린상사를 경영해온 장 고문 차남 장세환 대표는 사임했다. 이후 고려아연은 영풍빌딩을 떠나고 회사 로고도 변경했다. 야구로 치면 양 감독이 그라운드로 나와 신경전을 펼쳤고 양 팀 선수들도 감독을 따라 몰려나오며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난 것이다.


"기본적으로 맨몸으로 싸우는 게 원칙"…"다음날 선발투수는 예외"


하지만 벤치클리어링에도 룰이 있다. '배트, 스파이크 등으로 상대를 가격하지 않는다', '다음날 선발투수는 참여하지 않는다' 등이다.


실제 벤치클리어링은 기본적으로 맨몸으로 싸우는 게 원칙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고려아연의 자사주 공개매수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고려아연은 4일부터 자기자본 1조5000억원을 투입하고 모자란 금액은 차입해 최대 2조6600억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에 들어가 MBK·영풍의 공개매수를 무산시킨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문제는 이번 자사주 매입이 현 경영진인 최윤범 회장의 사익을 위한 것으로 비칠 수 있다는 데 있다.


엄밀히 말하면 이번 경영권 분쟁은 최 회장 일가가 자기 돈을 가지고 주식을 매입해 경쟁하는 것이 원칙이다. 법률적으로도 주주가 아닌 회사 경영진을 위한 자기주식(자사주) 취득은 배임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이미 고려아연이 진행하는 자사주 공개매수 가격은 고려아연 상장 이래 역대 최고가다.


"자기주식을 취득할 때 적정한 가격을 초과한 가격으로 평가해 취득하거나 처분한다면 회사에 손실을 초래하므로 상법 제399조에 따라 이사의 손해배상 책임이 추궁될 수 있고, 다른 요건을 충족한다면 형법 제355조에 따라 배임죄가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분석도 있다.


특히 고려아연은 자사주 공개매수 재원을 차입금·회사채 발행 등으로 조달하면서 부채비율이 기존보다 뛰게 된다. 예상 이자율은 최대 7%로, 연간 이자 비용은 약 1890억원에 달한다. 결국 주식 공개매수에 막대한 자기자본을 투입해 재무 부담이 가중되고 결과적으로 투자 여력이 줄어들 여지도 있다. 미래의 재원을 미리 당겨쓰는 것이다. 야구로 치면 다음날 선발투수가 벤치클리어링에 뛰어든 셈이다.


"싸울 땐 싸우더라도 지켜야 할 선 지켜야"


물론 야구의 벤치클리어링에선 흥분한 상태이다 보니 그 '룰'이 깨지기도 한다. 박찬호는 현역 시절 날라차기를 해 비난을 받은 경험이 있다. 다만 불문율을 깬 벤치클리어링에는 대가도 따른다. 정도를 넘어선 폭행, 배트 등 도구를 이용한 고의적인 폭행과 상해의 경우에는 법률이 개입한다. 그 한계를 넘어섰을 때는 당연히 처벌 받을 수 있다. MBK·영풍이 전날 자사주 공개매수를 결의한 최 회장을 비롯한 이사진을 형사 고소한 것은 그런 맥락이다.


재계와 시장 안팎에서는 고려아연과 MBK파트너스·영풍 연합이 모두 합해 6조원대의 '쩐의 전쟁'에 나서면서, 누가 이기든 사실상 실익이 없는 '승자의 저주'로 남을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앞으로 누가 경영권을 쥐든 미래를 위한 투자보다 현재 지분 경쟁의 후폭풍에 시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벤치클리어링이든 경영권 분쟁이든 '지켜야 할 선'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싸울 땐 싸우더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

지봉철 기자 (Janus@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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