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깃이 온다…'쪽지를 타고' [D:쇼트 시네마(90)]
입력 2024.09.07 09:09
수정 2024.09.07 09:09
지하연 감독 연출
OTT를 통해 상업영화 뿐 아니라 독립, 단편작들을 과거보다 수월하게 만날 수 있는 무대가 생겼습니다. 그 중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부터 사회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메시지까지 짧고 굵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50분 이하의 영화들을 찾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시험이 끝난 후 쉬는 시간은 우등생 소영(김정연 분)과 친구들이 답을 맞춰보기 한창이다. 이 때 소영이 멘토링을 해주고 있는 주은(김세연 분)이 다가와 쪽지를 건넨다. 쪽지에는 소영을 향한 응원의 말이 담겼다. 반장이나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쁜 소영은 누구에게나 사랑 받고 이목을 끄는 존재다. 평범한 주은에게 소영은 친해지고 싶은 상대이자 동경의 대상이다.
주은의 쪽지로 소영과의 관계는 가까워진다. 어느 날 주은은 소영이 일진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고백하며 무리 중 한 명의 치마를 훔치면 인정해 준다고 주은을 도발한다. 소영을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치마를 훔치고 소영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는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기말고사 정답지를 훔치자고 제안한다. 주은은 소영이 장난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농담이 아닌 걸 알고 결국 교무실에 몰래 잠입한다.
주은은 소영과 비밀을 공유하며 더 가까워질 것이라고 믿었지만, 이 믿음은 산산조각 난다. 소영이 주은이 기말고사 답안지를 훔쳤다고 제보했고, 주은은 교무실로 끌려가 퇴학 위기를 맞는다. 주은은 소영에게 선생님에게 이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 이번 일은 자신이 용서해 주겠다는 말과 함께.
지금까지 청춘물의 성격을 띄고 있던 장르는 이 장면과 함께 스릴러로 방향을 전환한다. 소영은 주은이 자신에게 품고 있는 호감을 이용해 사건을 일으키는 인물이었고, 이 모든 일은 단지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다.
주은이 답안지를 훔쳤다는 소문은 반 전체에 벌써 퍼졌고, 치마를 도둑 맞은 일진 친구까지 주은을 찾아와 구석으로 밀어 넣는다. 억울한 주은의 시선이 닿은 곳은 미소 짓고 있는 소영의 얼굴이다.
소영은 처음부터 주은과 친해질 마음도 없었으며 가스라이팅 해 사건을 키워 한 사람이 무너지는 일을 그저 즐길 뿐이다. 소영은 또 다시 다른 친구에게 힘내라는 쪽지를 받는다. 또 한 명의 먹잇감이 제 발로 소영의 손바닥 위로 올라갔다.
지하연 감독의 '쪽지를 타고'는 여고생들이 쪽지로 서로 감정을 주고 받는 귀엽고 일상적인 행동을 권력 관계를 투영해 청소년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심리를 조명했다. 쪽지는 관계 형성의 시작이지만, 동시에 관계를 조작하고 왜곡하는 매개체로 작용할 수 있음을 암시, 소영은 쪽지를 통해 주은의 감정을 이용해, 자신의 통제 아래 두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 관계성을 통해 장르적 전환을 주는 재미를 선사했다.
영화의 결말은 서늘한 여운을 남긴다. 소영은 주은을 이용해 큰 사건을 일으킨 후, 새로운 쪽지를 받으며 먹잇감을 찾았다. 이는 소영이 가스라이팅을 통해 끊임없이 사람들을 조종하고 희생양으로 삼는 순환 구조를 상징하며, 이러한 악순환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러닝타임 2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