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정부처럼 대출 창구 닫으란 건가…금감원장 압박에 은행권 '당혹'
입력 2024.08.30 06:00
수정 2024.08.30 06:43
이복현 "금리 인상 바란 것 아니다"
가격 통한 수요 억제 방식 아니라면
인위적 대출 공급 축소 나설 수밖에
총량 규제로 혼란 겪었던 아픈 기억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가계대출을 잡으라는 당국의 주문에 금리를 올려 대응하는 건 편의주의적 발상이라며 압박 수위를 높이자 은행권에서는 당혹스러운 분위기가 읽힌다. 가격을 통한 수요 조절이 아니라면 결국 필요 조건을 갖춘 이들에 대해서도 대출을 내주지 않는 방식을 택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시장의 혼란을 가중할 수 있어서다.
특히 이미 지난 정부에서 이처럼 가계대출을 막는 총량 규제를 실시해 홍역을 치른 바 있는 은행들로서는 앞으로의 추이에 더욱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30일 금융권에 따르면 이 원장은 지난 25일 KBS의 '일요진단 라이브'에 출연해 "최근 은행의 주담대 금리 인상은 금융당국이 바란 게 아니다"며 "수도권 집값과 관련해 개입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상반기 은행들도 예상치 못한 시장 촉발 요인 때문에 예상보다 가계대출 수요가 급증했고, 이에 놀라 쉽게 관리하기 위해 금리를 올린 것"이라며 "소비자 입장에선 이자가 많이 늘어나다 보니 불만이 나오는 것도 이해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은행들이 쉽게 돈을 많이 벌기 위해 금리를 올리는 식으로 대응하기보단 포트폴리오를 체계적으로 관리했으면 좋겠다"며 "지금까지는 시장 자율성 측면에서 은행들의 금리 정책에 관여를 안 했지만, 앞으로는 은행에 대한 개입을 더 세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이는 꿈틀대는 가계부채를 잡기 위한 금융당국의 정책이 실수요자의 이자 부담만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일자, 은행권에 금리 인상을 중단하라는 경고장을 날린 것으로 해석된다. 주요 시중은행들은 가계대출을 옥죄라는 금융당국의 요구에 지난달부터 스무 차례 이상 대출 금리를 올린 상태다.
그럼에도 은행권 가계대출은 주택담보대출을 중심으로 계속 몸집을 불리고 있다. 5대 은행의 주담대는 이번 달 들어서도 6조원 넘게 급증했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 등 5개 은행의 주택담보대출 잔액은 이번 달 22일 기준 565조8957억원으로 지난 달 말보다 6조1456억원 늘었다.
월말까지 아직 열흘 가까이 남은 만큼, 이런 속도라면 이번 달 증가 폭은 사상 최대였던 지난 7월을 넘어설 가능성이 있다. 해당 은행들의 지난 달 말 주담대 잔액은 559조7501억원으로 전월 말보다 7조5975억원 늘었다. 이같은 증가 폭은 5대 은행에서 확인할 수 있는 2016년 1월 이후 시계열 가운데 월간 최대치다.
시장에서는 부동산 시장이 회복되는 가운데 금융당국의 정책 미스가 겹치면서 가계대출 증가를 부채질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가계대출 문턱을 한층 높이는 2단계 스트레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를 당초 지난 7월부터 시작하기로 했다가, 이를 돌연 오는 9월로 연기하면서 이른바 막차 수요를 부추겼다는 얘기다.
스트레스 DSR은 나중에 금리가 더 오를 것으로 가정하고 미리 대출 한도를 제한하는 규제다. DSR은 대출받은 사람의 연간 소득 대비 각종 대출의 상환 원금과 이자 등의 비율이 은행 기준 40%를 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다.
이런 와중 금리를 올리지 말고 가계대출을 최소화하라는 금감원장의 발언은 은행들 입장에선 인위적으로 대출 여부와 한도를 묶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대출의 가격인 금리를 올리지 않고 수요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문제는 고객 입장에서 예상했던 금액보다 빌릴 수 있는 돈이 줄어들며, 계획했던 자금 운용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예상했던 한도만큼 은행에서 돈이 나오지 않거나, 아예 대출 창구가 문을 닫으면서 자격 요건을 충족했음에도 자금을 융통할 수 없는 현실에 맞닥뜨릴 수 있다.
실제로 지난 정권 시절이던 2021년 당시 은행권의 대출 증가율을 정해 놓고 관리한 총량 규제가 실시되면서 이런 상황이 펼쳐졌다. 규제에 막혀 대출을 내줄 수 없게 된 은행들이 더 이상 돈을 빌려주지 않자, 부동산 등 실수요를 위한 자금줄이 막힌 서민들이 발만 동동 구르며 여론이 급격히 악화된 것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총량 규제 등 가계부채를 인위적으로 막는 정책보다는 실수요 중심으로 풀어나가겠다는 게 이번 정부 출범 때부터의 기조였다"며 "금리를 통한 수요 조절을 넘어 공급량을 직접 손댈 수 있다는 식의 메시지는 시장에 혼선을 부추길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