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 다크호스 이도현, ‘멜랑꼴리아’ 수학 천재의 질문 [홍종선의 명장면⑨]
입력 2024.04.04 08:33
수정 2024.04.04 08:34
영화 ‘파묘’를 보고 배우 이도현을 새로이 주목하게 됐다고 말하는 관객이 많다. 순하게 잘생긴 얼굴에 따뜻한 느낌을 지닌 배우가 강렬한 역할을 하니 더욱 돋보인다는 호평의 목소리가 높다.
익히 우리가 그 연기의 진가를 맛본 최민식이나 유해진, 김고은이 아닌 배우가 일으킨 파동이기에 다크호스 이도현을 향한 박수가 뜨겁다.
‘파묘’(감독 장재현, 제작 ㈜쇼박스·㈜파인타운 프로덕션, 공동제작 ㈜엠씨엠씨, 제공·배급 ㈜쇼박스)를 다시 보니 굿판에서 북 치는 악사이자 경을 읊는 법사 윤봉길, 그를 연기한 배우 이도현의 대단함이 더욱 도드라진다. 이화림(김고은 분)을 향한 무조건적 헌신과 보호 의식이 그렇게 ‘달달’할 수가 없고, 제정신일 때도 귀신이 쓰였을 때도 멋지다.
특히 병상에 누워 빙의된 마귀였다가 그 악마를 향해 충성을 결의하는 정신 나간 봉길이었다가 할 때는 관객에게 정신이 혼미할 정도의 숨죽인 집중을 경험케 한다. 당연히 곁에서 오광심 역의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 김선영, 계속해서 아름다운 성장을 보여주고 있는 박자혜 역의 김지안이 집중의 깊이를 보탠다.
첫 번째 관람 때는 윤봉길만 귀에 들어왔지만 알고서 보니 오광심, 박자혜까지 모두 항일 독립운동가의 이름에서 따온 것에서 이미 영화 후반부 일본 귀신의 등장과 ‘범의 허리를 끊은 여우들’에 대한 사냥이 예고된 셈이다.
박지용(김재철 분)의 할아버지, 악령이 된 종순을 봉길의 몸에 불러들여 다시 관에 가두려 하는 영안실 장면에서 보듯 봉길은 귀신을 받는 신주 역할이 가능하고, 이때 이미 영화 후반 봉길의 병실 사투 장면이 예상 가능한데. 등장할 것을 알고 보고, 이미 봤던 장면을 다시 보더라도 혀를 내두르게 된다는 지점에서 화림의 대살굿과 더불어 ‘파묘’의 백미다.
그렇게 쑤욱, 군에 입대해 있어도 쑤욱 관객의 마음속으로 쏙 들어온 배우 이도현.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지듯, 배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지나간 출연작들이 보고 싶어진다. 예전과 달리 특정 배우에 대한 탐색의 여정은 상당히 간편해졌다. OTT(Over The Top, 인터넷TV) 시대가 고마운 순간이다.
이도현의 출연작 가운데 관람하거나 시청하지 않았던 혹은 못 했던 작품들을 훑어본다. 뭐부터 볼까. 드라마 ‘멜랑꼴리아’(연출 김상협, 극본 김지운, 제작 스튜디오드래곤 본팩토리, 편성 tvN)가 낙점을 물었다. 사실 좋아해 마지않는 배우 임수정이 함께 출연했음에도 방영 당시 선택하지 않았던 것은 엔딩은 결국 바르게 가겠지만 긴 듯 아닌 듯 사제지간에, 성년과 미성년 사이에 멜로를 상정하는 설정 때문이었다.
섣부른 판단은 역시 금물이다. 볼 만한 이유가 있는 드라마다. 수학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문제를 푼다는 게 얼마나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지가 그림처럼, 시처럼 펼쳐져 있다.
칠판 앞에 서서, 수학을 사랑하는 두 애호가가 마치 피아노 협연을 하듯 병서해 나가는 모습은 실로 한 폭의 그림이다. 그것도 두 줄기 햇살이 내리쪼이듯 빛나는 장면이다.
또 하나의 명장면은 그림보다는 시처럼, 눈이 아니라 귀로 파고들어 와 뜻을 전한다. 수학 문제를 푸는 즐거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삶에서 결국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시사하는 말귀다.
“수학자의 삶은 어떤 문제를 푼다고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고 못 푼다고 불행해지는 것도 아니야. (그럼, 왜 수학자들은 계속 풀고 증명을 해요?) 문제를 푸는 동안의 떨림, 흥분, 불안. 답이 나오든 나오지 않든 몰두했을 때만 만날 수 있는 그런 순간들 때문 아닐까? 몰두하지만 얽매이지 말고, 좋아하지만 집착하지 않았으면 했어, 네가 수학에 대해서.”
그럼, 왜 수학자들은 계속 수학 문제를 풀고 증명해요? 한때 수학 천재 소년으로 불렸던 아성고 2학년 백승유(이도현 분)가 혼돈의 가운데 서서 묻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사고를 배울 수 있는 학문으로 수학을 가르치는 지윤수 선생님이 답한다.
수학자의 자리에 ‘나’ 또는 ‘우리’를 대입하고, 수학 문제를 ‘삶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해 보면 가슴이 뛴다. 좋아하는 것에 돈이나 출세, 합격이나 인정 같은 사회적 성공을 대입할 수도 있겠고 사랑이나 건강, 행복 같은 가치를 추구할 수도 있겠다.
그게 무엇이든 그것을 이루고 이루지 못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진정 기쁘게 하는 것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몰두해 추진해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만나는 떨림과 흥분과 불안이 중첩된 순간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짚는다.
마치 절정의 순간처럼, 몰두했을 때만 만날 수 있는 충일한 행복감. 드라마 ‘멜랑꼴리아’가 우리에게 제안하는 행복의 정체, 인생이라는 농사에서 행복을 수확하는 방법이다. 거기에서 한 발 나아가 제안한다. 몰두하되 얽매이지 말고, 좋아하되 집착하지 말라고. 그랬다간 그 반대의 절망과 불행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얽매임과 집착을 깊게 부른다. 인간의 조절력 밖에 있는 것은 마약만이 아니다, 돈이나 지위의 수직적 상승에 대한 열망도 중독을 부른다. 결국 좋아하는 일이 무엇이든 가득한 행복감을 맛볼 순 있겠지만 10화에서 백승유의 입을 통해 말해지는, 떨림·불안·흥분에서 표현만 바뀐 몰두의 즐거움·탐구의 고통·발견의 희열이 인생의 진정한 성취와 행복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에 몰두할 것인가’라는 시작점도 중요하다.
뜨끔하고 따끔한 인생 조언을 마음에 담고 ‘다음 화’ ‘다음 화’를 계속 누르다 문득 생각한다. 누군가 이미 발견했든 우리가 미처 알아주지 못했을 때도, 2021년 드라마인데 이도현은 이미 연기를 잘하고 있었네!
우울이라는 뜻을 지녔지만, 우울의 바닥을 찍고 나면 다시 햇살을 맞으며 상승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제목의 드라마 ‘멜랑꼴리아’는 티빙, 넷플릭스 등의 OTT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