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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계단’에서 만난 예수정 어머니, 배우 정애란 [홍종선의 신스틸러⑧]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입력 2024.03.07 08:33
수정 2024.03.07 08:33

‘이만희 감독’을 등대 삼아 택한 영화 ‘마의 계단’

문정숙·김진규·방성자 호연 속 개성파 정애란

작품 속 또 하나의 신스틸러 두 개의 ‘계단’ 눈길

영화 ‘마의 계단’(1964)에서 간호장을 연기한 배우 정애란 ⓒ사진 출처=네이버 블로그 cjs2136


어떤 영화를 선택할 때 감독과 배우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드물게 제작사나 촬영감독, 시나리오작가, 음악감독, 미술감독 등의 스태프 이름을 확인한다. 특히 오래전 영화를 택할 때는 정보가 많지 않기 때문에 출연 배우와 연출 감독이 누구인가는 관람 여부를 가른다.


보통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우리가 더 잘 기억하는 이름은 배우의 것이다. 상대적으로 감독보다 출연작이 많고 대중 앞에 더 가까이 서 있다. 예외인 경우가 있으니 스타 감독의 경우다.


감독 이만희 ⓒ사진 출처=한국영상자료원

20세기 한국 스타 감독 가운데 특히나 그 이름이 21세기에도 종종 언급되는 감독 중 한 명이 이만희다. 연극배우로 시작해 단역 출연으로 영화와 인연을 맺고 감독수업을 통해 ‘주마등’으로 데뷔한 뒤 ‘다이알 112를 돌려라’ ‘돌아오지 않는 해병’ ‘만추’ ‘암살자’ ‘태양 닮은 소녀’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연출하고 ‘삼포 가는 길’을 유작으로 남긴 감독 이만희.


잘생긴 외모, 페르소나 여자배우들과의 러브스토리보다 더 많은 이가 기억하는 건 영화에 모든 걸 바치다 건강을 해쳐 44세의 나이에 요절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둘째 딸이 배우 이혜영이라는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점으로 돌아와, 영화 ‘마의 계단’을 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이만희 감독의 작품이어서였다. ‘마의 계단’(1964)은 감독 이만희에 관한 관심을 영화로 돌리기 충분한 작품이다.


영화 ‘마의 계단’에서 촉망 받는 외과 과장 현광호를 연기한 김진규와 병원장 딸 오정자를 연기한 배우 방성자(오른쪽부터) ⓒ사진 출처=네이버 블로그 cjs2136

50편 넘는 영화를 연출했으나 필름이 남아 있지 않은 작품이 많아 귀한 가운데 한국영상자료원이 2019년 블루레이로 출시했다. 김기영의 ‘하녀’(1960)와 알프레드 히치콕의 ‘사이코’(1960)로부터 조금 뒤, 봉준호의 ‘기생충’(2019)보다 한참 전인 시기에 ‘계단’이라는 영화적 장치를 시각적으로 위태롭고 심리적으로 불안한 요소로 활용했다. 제목에서부터 ‘마(魔)’를 운운하니 음기 서린 분위기가 짙게 드리우며 공포심과 긴박감을 배가시킨다.


이만희 감독 특유의 빠른 진행과 예민한 편집이 영화에 긴장과 불안감을 불어넣는 가운데. 배우들의 안정적 연기가 돋보인다. 지적 카리스마를 보유한 김진규, 김혜자와 탕웨이 이전 ‘만추’의 여주인공이었던 연기파 배우 문정숙이 영화를 이끌고 서구적 섹시미와 귀여운 매력을 동시에 지닌 방성자가 두 남녀 주인공 사이에서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전원일기’ 할머니 박부용 역의 배우 정애란 ⓒ화면 갈무리

그런데! 영화를 보다가 예상치 못한 ‘반가운 얼굴’의 등장에 영화를 보는 재미가 커진다. 간호장 역할의 연기자 덕분이다.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김민재 회장(최불암 분)의 어머니, 박부용 할머니를 연기했던 배우 정애란이다.


우리의 기억에 ‘전원일기’ 할머니는 늘 머리 하얀 할머니였고, 드라마 후반에는 대사도 한참 줄어 ‘정신적 지주’ 역할이 컸던 지라. 영화 ‘마의 계단’에서 딸 예수정 배우처럼 날씬한 몸매에 검은 머리를 하고 부지런히 오가는 모습을 보니 격세지감이 크다. 신기한 건, 얼굴 모습은 ‘전원일기’ 시절 그대로여서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


영화 ‘마의 계단’의 한 장면. 배우 정애란과 문정숙(오른쪽부터) ⓒ사진 출처=네이버 블로그 cjs2136

그저 20년 넘게 한 드라마에서 본 연기자라 인상적인 게 아니다. 간호장은 모든 걸 알고 있되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사실이라 할 수 없는 증언과 발언으로 사건의 방향과 관객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그 믿음직한 동시에 의뭉스럽고, 냉정해 보이지만 결말까지 보고 나면 더없이 인간적이고 따뜻한 인물을 배우 정애란은 개성적으로 연기했다.


무엇보다 ‘마의 계단’에는 외과 과장 현광호(김진규 분)의 환각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장면들이 꽤 많이 나오고, 이는 공포감을 극대화하기도 하지만 자칫 앞뒤 이가 딱 맞는 추리영화의 매력을 떨어뜨릴 수 있는데. 카메라가 포착해 화면 위에 보여주지 않았을 뿐, 간호장의 조력이 뒷받침됐다고 추리해 보면 가능한 일이라. 결국 정애란은 ‘마의 계단’이 공포로만 치닫지 않고 추리 가능한 미스터리영화의 측면도 갖추도록 하는 ‘숨은 열쇠’이다.


오랜 연인이었던 현광호가 병원장 오장길(최남현 분)의 딸 정자(방성자 분)와 결혼하며 임신한 자신을 배신하자 복수에 불타는 간호원 남진숙(문정숙 분). 간단히 말하자면, 드라마 ‘청춘의 덫’ 같은 구조의 이야기를 미스터리 스릴러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마지막 퍼즐이 간호장이다. 배우 정애란은 간호장의 역할을 잘도 숨긴다.

영화 ‘마의 계단’ 블루레이 표지 ⓒ사진 출처=한국영상자료원

영화 ‘마의 계단’에 또 하나의 신스틸러가 있으니 ‘계단’이다. 영화에는 병원 내부에 하나, 바깥벽에 하나, 두 개의 계단이 있다. 실내 계단은 난간이 자꾸만 부서지고 사람이 다치고 죽어 나가 보기만 해도 두려움을 유발한다.


실외 계단은 생긴 것부터 아찔하게 가팔라서 불안한데 그 계단을 통해 원혼과 같은 ‘마귀’가 병원 안으로 침입할 것 같은 오싹함을 안겨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정문이 열리지 않아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인 동시에 무엇인가가 수장돼 있을 것 같은 연못 안으로 계속 이어질 것만 같은 다리로 느껴진다.


사람이 북적이면서 사건도 계속 일어나는 실내 계단, 아무도 없으나 누군가 있는 것 같은 실외 계단, 어느 쪽이 ‘마의 계단’인지는 관객 각자에게 답이 있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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