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착기 이동 중 사망은 산재 아닌 교통사고 [디케의 눈물 189]
입력 2024.03.01 05:11
수정 2024.03.01 05:11
굴착기 운전자, 2021년 공장서 근로자 치어 숨지게 해…법원 "업무상 재해 아냐"
법조계 "작업 아닌 운전 중 벌어진 사고…산업안전법 아닌 도로교통법 적용해야"
"작업장 길목 전부 현장으로 간주하면…관리자 책임 무한대로 늘고 지위 불안해져"
"최근 도급사 책임 크게 묻고 있는 추세…해당 판결, 정부 기조와 맞는지는 의문"
공장 내 굴착기 인명사고라도 도로 이동 중에 발생했다면 산업재해가 아닌 교통사고로 봐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법조계에선 굴착기가 작업 중이 아닌 이동 중이었고 사고장소는 작업장이 아니고 평소 일반 차량도 오가는 도로였기에 산재로 보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관리감독 책임을 무한정 확대했을 때 관리자의 지위가 불안해질 우려가 있기에 기준 확대의 '최고 바깥선'을 그어준 의미의 판결이라고 강조했다.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울산지법 형사3단독(부장판사 이재욱)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HD현대중공업 법인과 대표이사에게 벌금 1000만원을 각각 선고했다고 최근 밝혔다. 또 교통사고처리 특례법 위반(치사) 혐의로 기소된 굴착기 운전자 A씨에게는 금고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앞서 A씨는 지난 2021년 9월 말 HD현대중공업 내 도로에서 굴착기를 몰고 가다 걸어가던 하청업체 근로자 B씨를 치어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은 평소 근로자들이 수시로 오고 가는 길임에도 회사 측이 근로자들의 통행을 막지 않은 채 굴착기 운행을 지시했고 이동경로에 관리자를 배치하지 않은 점에서 회사 측에 책임이 있다고 보고 재판에 넘겼다. 그러나 재판부는 사고가 작업과는 무관하게 도로를 따라 이동하던 중에 발생했기 때문에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를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사고가 난 도로는 인도와 차도가 구분돼 있고 평소에도 굴착기와 지게차, 화물차 등이 이용하는 곳이기 때문에 작업 장소라고 볼 수 없다"고 선고 이유를 밝혔다.
김가람 변호사(법무법인 굿플랜)는 "작업 중이 아니고 굴착기 이동 중 벌어진 사고이고 사고장소도 도로였기에 법원에서는 A씨가 사실상 작업이 아닌 운전 중에 피해자를 치었다고 보고 도로교통법을 적용한 것이다"며 "작업장을 오가는 길까지도 전부 작업 현장으로 보고 관리감독자의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관리감독자가 어디까지 책임을 지고 어디까지를 관리감독의 범위로 포함시킬 수 있는지 기준을 정해준 의미의 판결이다. 작업 현장까지는 관리자의 책임이고 이를 벗어나는 순간부터는 관리자의 책임 범위 밖이라는 뜻이다"며 "최근 관리감독의 책임이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지만 무한정 확대했을 때 관리자의 지위가 불안해질 우려가 있기에 확대의 최고 바깥선을 그어준 것으로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전문영 변호사(법무법인 한일)는 "'산업재해'란 노무를 제공하는 사람이 업무에 관계되는 건설물 등에 의하거나 작업 또는 그 밖의 업무로 인해 사망 또는 부상하거나 질병에 걸리는 것을 말한다. 이 사건의 경우 사고가 난 도로는 인도와 차도가 구분돼 있고, 평소에도 굴착기나 일반 차량, 오토바이 등이 이용하는 곳이기 때문에 애초에 작업장소가 아니라고 보고 산재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사업주는 자신이 운영하는 사업장에서 안전상 위험이 있는 작업을 할 경우 안전조치를 취해야 한다. 굴착기 사용 시에는 운전 중인 굴착기에 접촉돼 근로자가 부딪칠 위험이 있는 장소에 근로자를 출입시켜서는 안 되고 유도자를 배치해 굴착기를 유도하게 하는 등의 주의의무가 있다"며 "도로와 작업장소와 분리가 어렵거나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기 어렵다는 등의 사정이 있다면 위와 같은 주의의무를 준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도윤 변호사(법률사무소 율샘)는 "넓은 공장 안에서 일어난 사고라면 다 산업현장으로 봐야 한다고 본다. 업무상 재해가 인정되지 않은 판결은 다소 납득하기 어렵다"며 "작업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이동 중 일어난 사고이기는 하나 '산업안전보건기준'에 따르면 작업을 시작하기 전, 후로 정리할 때까지 계속 점검을 하도록 돼 있다. 단순히 현장작업이 끝났다고 해서 모든 업무가 끝났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특히 최근에는 도급사의 책임을 더 크게 묻고 있는 추세인데 해당 판결이 과연 정부의 기조와 맞는지도 의문이다"며 "사회적 인식을 반영해서 조금 더 엄한 처벌을 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