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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도 넘기 힘든 조령관문, 조령산성

최진연 기자 (cnnphoto@naver.com)
입력 2008.10.23 11:07
수정

<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수많은 비밀이 골골이 서려있는 역사의 길

황급히 달려온 말 한필이 성문 앞에 멈춰 섰다. ‘장군 적들이 성을 향해 진격해 옵니다.’다급해진 전령의 거친 숨소리에 장군은 큰소리로 ‘대오를 갖추어라, 성문을 걸어 잠그고 각자 현 위치에서 한 치도 이탈하지 마시오.‘ 방송국 대하드라마의 한 장면이다.

가을이 무르익는 조령관문

드라마 세트장으로 잘 알려진 조령관문, 고산준령이 병풍처럼 이어진 천혜의 요새에 가을이 무르익고 있다.

민초들의 전설이 즐비한 계립령은 삼국시대부터 쟁탈전의 무대였다. 경북 문경 관음리와 충북 미륵리를 잇는 일명 하늘재, 이곳을 차지하는 세력이 곧 한반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신라는 한강북쪽에 자국(自國)의 깃발을 꼽는데 목표를 세웠다.

주흘문 앞에도 가을이 익어간다.

신라의 선봉대는 한강 진격을 위해 빠른 길을 찾았다. 영남에서 한강 진출의 첫 번째 교두보가 바로 하늘재였다. 신라 8대왕 아달라이사금은 156년 마침내 북진의 길을 뚫었다.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고갯길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신라는 문경을 배경으로 하늘재의 대원령산성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남진을 저지시켰다. 그리고 이재를 넘으면 곧바로 충주 땅. 그곳부터는 남한강의 수운을 이용해 한강하류까지 일사천리로 군수물자를 흘러 보냈다. 또한 이 고개에서 북으로 흐르는 물은 한강, 남으로는 낙동강이 돼 한반도의 젖줄이 되었다.

조령관문 성황당 여신
세월이 흘러 조선은 하늘재에서 주흘산 문경새재로 고갯길을 옮겼다. 나는 새도 넘기 힘든 다는 새재길은 영남에서 한양 가는 대로상 가장 높고 험한 고개였다. 사람의 왕래가 많아지면서 문경은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은 물론 국방상의 요충지가 됐다. 그래서 우리 땅에서 가장 많은 산성이 축조된 곳도 이지역이다.

지금의 조령산성은 임진왜란 때 새재가 무방비 상태로 함락 당한 후 쌓은 것이다. 가장 먼저 중성인 2관문 조곡관을 축조하고 그다음 1관문인 주흘관에 초곡성을 쌓았다. 그 후 3관문인 조령관과 조령산성을 축조했다. 3곳에 관문과 부속성이 쌓여진 것이다.

성벽은 1관문인 주흘관 좌우에서 급경사를 타고 8부 능선에서 끝났다가 다음 골짜기로 이어지면서 장장 8km에를 달린다. 성벽은 다듬지 않은 화강암에 2~3m 높이로 쌓았다. 견고하지 못하지만 성벽위에는 갓돌도 얹었다. 중간 중간에 여장도 설치했다. 축조법은 덕주산성 1곽의 내성과 흡사하다. 성벽은 인적이 없어 고색 짙지만 가파른 경사 때문에 답사는 위험하다.

산성의 정문인 주흘관은 홍예문위에 문루를 세웠다. 성문 오른쪽 성벽에는 축성당시 감독과 공사내역을 알리는 명문(明文)이 새겨져 있다. 그 옆에는 개울물을 흘러 보내는 원형의 수구문도 볼 수 있다. 주흘관은 3개의 성문 중 가장 웅장하며 축성 때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새재의 옛길을 산책하는 여인들

성문을 지나 처음 맞는 조령원 터는 1관문과 2관문 사이에 자리 잡았다. 네모반듯한 돌담 속에 면적은 600평이다. 삼국시대부터 여기에 건물이 있었다. 원(院)은 출장 가는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기위해 역과 역 사이 인적이 드문 곳에 세웠다.

어찌 관리들만 이용했을까. 먼 길가는 나그네들에게 밤길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들에게 쉬어 갈 수 있는 숙소가 되기도 했다. 원 터를 지나면 옛사람들의 애환이 배어있는 주막집도 복원됐다. 이제는 옛사람들이 아니라 관광객 또는 산성 답사팀들이 목을 축이는 명소로 변했다.

가고 오는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주고받았던 교귀정도 말끔하게 복원했다. 이곳저곳 암벽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끓이지 않았다

조선후기 최초의 한글이 새겨진 ‘산불됴심‘ 표석도 남아있다. 비뚤어진 자연석 화강암에 높이 157cm의 음각한 보기드문 한글비석이다.

배고품을 달래려고 깍아 먹은 소나무 껍질

행인들 발길이 잦은 곳에 세워 지나는 길손들에게 산불예방을 강조하면서 자연보호의 경각심을 심어주고 있다. 최근 이 비석을 문화재로 지정하자는 여론이 일고 있다.

노송이 우거진 숲길에서 만나는 2관문 조곡관은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가을단풍은 여기서 절정에 달한다. 다리 난간석에 기대어 잠시 쉬어본다. 조령관문에서 가장 먼저 축성한 조곡관의 자태는 계곡물과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를 만들었다.

조곡관을 지나면서부터는 새재의 백미를 볼 수 있는 옛길을 만날 수 있다. 새재 길은 좋은 역사만 있는 곳이 아니다. 300m의 짧은 길이지만 고달픈 삶을 묵묵히 걸었을 옛사람들의 정취가 배어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곳에는 오가는 길손들이 굶주림을 참다못해 소나무 껍질을 벗겨먹었던 흔적은 가슴을 아리게 한다.

국내 최초의 한글이 새겨진 비석
옛길을 지나면서부터는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한다. 이제 마지막 관문인 조령관에 도착한다. 두어 시간 남짓 걸으면서 갈증을 풀어주는 옛 우물, 감로수가 따로 없다.

설악, 오대, 소백산을 지나 죽령을 만들고 도솔봉을 지나 황장산 마루를 타고 흐르는 백두대간. 총길이 690km 중 110km가 문경 땅을 지나고 있다.

무수히 부서진 성벽 위를 지나는 백두대간의 험준한 산등성이. 이를 감싸 않은 조령산성은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유적뿐만 아니라 늘 우리와 함께 있어온 설화, 민요 등 수많은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조선시대 때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으로 향하던 영남선비, 부보상 이지방의 세곡과 궁중 진상품 등 각 산물들이 이 고개를 넘었다.

수많은 역사의 비밀이 골골이 서려 있는 새재 길은 이 땅을 살아온 옛 사람들의 숨소리가 가득하다. 그래서 사학자들의 관심과 역사연구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곳도 이곳이다.

△지정 - 사적 제147호
△위치 - 경북 문경시

최진연 기자 (cnnpho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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