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브로 1400원 환율, 우리 기업 잡아먹는다 [기자수첩-금융증권]
입력 2023.10.30 07:00
수정 2023.10.30 07:00
원화 가치 급락에도 무덤덤한 시장
强달러에 외국인 자본 영향력 확대
힘겨루기서 밀리는 토종 투자 현실
타협해서는 안 될 대한민국의 국력
원·달러 환율 이미지. ⓒ연합뉴스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게 문제."
환율이 심상치 않다는 얘기를 나누던 투자금융(IB)업계 관계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향해 가면 여기저기서 나라가 망한다고 떠들어 대던 적이 10년도 안 됐는데, 이제는 이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시장 분위기가 무섭다는 토로였다.
우리 돈의 가치는 올해 들어 곤두박질치고 있다. 원화 대비 미국 달러화의 가치를 보여주는 원·달러 환율은 올해 2월까지만 해도 1200원을 갓 넘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이번 달 들어서는 1300원대 중반을 오가고 있다. 그 만큼 원화는 싸졌고, 달러는 비싸졌다는 의미다.
원·달러 환율 1400원은 우리 경제가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는 증표였다. 한국 정부가 환율 변동제를 도입한 건 1990년 3월. 이후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돌파했건 건 1997년 12월과 2008년 11월이었다. 우리 경제가 유래 없는 시련에 놓였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때였다.
올해 원/달러 환율 추이. ⓒ데일리안 부광우 기자
하지만 지난해 9월 또 다시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넘어섰을 때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과거와 같은 경제적 환란 없이 일이 벌어진 탓(?)이었을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팬데믹을 벗어나며 미국이 빠르게 기준금리를 끌어올린 충격 정도로 받아들인 금융시장은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스포트라이트는 금리로 옮겨졌다. 미국 기준금리가 한국은행 기준금리를 제치고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하자, 국내 금융시장에서의 자본 유출을 염려하는 목소리는 극에 달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양국 사이의 기준금리 격차는 사상 최대인 2.00%포인트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어쩐지 염려했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른바 한-미 금리 역전이 지속된 지도 1년을 맞았지만, 오히려 외국인들은 우리나라에 투자를 늘리고 있다. 한은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 달까지 주식과 채권 등 국내 증권에 대한 외국인의 투자 자금은 총 154억2000만 달러 순유입을 기록 중이다.
미국 금융시장의 이자율이 훨씬 높음에도 국내 시장에 돈이 계속 들어오고 있는 건 우리 경제의 기반이 그 정도로 많이 탄탄해졌다는 반증일 수 있다. 아울러 한국 기업들을 향한 투자 수요도 여전하다는 뜻이다.
그러자 다시 눈에 띄는 건 환율이다. 해외 자본이 우리 기업에 대한 투자를 넘어 직접 잡아먹으려 들 때 가장 큰 무기는 강(强)달러다. 우리 돈의 가치가 바닥까지 떨어져 있으니, 달러를 손에 쥔 외국인의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IB업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한 조(兆) 단위의 인수합병(M&A) 거래 8조9000억원 가운데 60%에 이르는 5조1000억원은 외국계 기업과 펀드의 몫이었다. 대표적으로 지난 3월 보안 전문기업인 SK쉴더스는 스웨덴 발렌베리가(家) 사모투자펀드 운용사인 EQT파트너스로 3조원에 매각됐다.
이 때문에 IB업계에서는 지금과 같은 고환율을 새로운 표준처럼 받아들이는 분위기에 공포감마저 일고 있다. 이대로라면 토종 자본은 대형 자본 거래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 있다는 심정이다.
복잡한 금융 논리를 차치하고, 환율은 그 나라의 국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지표다. IMF 사태를 되새겨 보면, 2000원이 찍혀 있던 원·달러 환율 전광판의 모습은 아직도 망국의 이미지로 뇌리에 남아 있다. 우리가 언제더라도 고환율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