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연예단상⑫] 노장이 필요한 이유, '택배기사'와 김의성
입력 2023.05.22 09:13
수정 2023.05.22 09:14
뚝딱 할배가 청춘에게 전하는 위로
노장, 많은 경험을 쌓아 자기 일에 노련한 사람. 넷플릭스 드라마 <택배기사>를 살린 건 노장 배우 김의성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라마 <택배기사>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는 가운데, 아니 비호감이 훨씬 많은 가운데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 건 ‘뚝딱 할배’가 남긴 명대사에 대한 공감이다.
<택배기사>를 두고 ‘수면제 드라마’라는 댓글이나 평가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있어 기승전결 각각의 미덕이 제대로 살지 못하고 짧아야 할 때 길게, 충분한 길이가 필요할 때 서두르다 보니 그 엇박자에 적응이 되지 않아 몰입하지 못하고 흐름을 놓쳐 졸았다는 얘기다. 개인적 시청 소감이라는 전제로, 필자도 초반에는 몇 번이나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며 높은 진입장벽을 느꼈고 마지막에는 번갯불에 콩 볶듯 급하게 마무리하는 느낌을 받았다.
5-8번 택배기사를 연기한 김우빈 혹은 그 캐릭터를 두고도 “마스크를 써도 멋있다” “선한 눈빛을 살려 난민에게 희망을 주는 캐릭터를 따뜻하게 연기했다”는 것에는 모두가 엄지를 세우지만, 최강 택배기사라 해놓고 별다르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액션 장면이 없다며 아쉬움을 표한다. 그저 총 좀 멋진 자세로 쏜다고 최강이 아닌데, 게임 속 캐릭터 5-8만 잘 싸우면 되는 게 아닌데, 격투의 순간 너무나 강한 상대를 주먹으로 한 방 날리고 끝이니 맥이 빠진다는 게 중론이다.
물론 너무 강해서 주먹 한 방이면 된다는 설정이겠으나 그것은 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톰 크루즈가 시작 장면에 보여주는 정도라도 ‘와아!’ 탄성을 자아낼 만큼의 특별한 액션을 보여준 뒤에 나와야 ‘주먹 한 방’의 쾌감이 전해오는 것이다. 김우빈이 ‘주먹왕 랄프’보다 센 마동석은 아니지 않은가. 신체 조건 좋고 액션 감각 좋은 배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간혹 1.5배속으로 봐도 정상 걸음보다 느리게 보일 만큼 김우빈만 등장하면 런웨이를 걷는 모델처럼 슬로우모션으로 처리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액션 얘기를 조금 더 보태자면, 250억 원의 제작비를 CG와 세트에만 쓴 것인가 할 만큼 특별히 <택배기사>를 위해 고안된 액션 시퀀스가 드물다. 야구공을 쏘고 배트 대신 주먹으로 날리는 장면 정도 외에 인상적으로 신선한 구성의 액션을 찾기 어렵다. 추격전이 있고 총격전이 있지만 그냥 ‘떼 신’이다. 관객을 그 액션의 현장 속으로 끌어와 실감을 전하려면 개인 플레이가 있어야 한다.
현재 개봉 중인 영화 <존 윅 4>를 보면, 키아누 리브스에게 새로이 쌍절곤 하나를 들려 주거나 견자단을 시각장애인으로 등장시켜 지팡이 액션을 구사하게 한다. 집단 대 집단의 장면에서도 오사카 컨니넨탈 호텔 대표의 딸이자 컨시어지로 근무하는 아키라(사와야마 리나 분)에게 활과 단검을 쓰게 해 도드라지게 한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라 할 특별코어 구역의 천명에 진입할 때 등장인물들조차 천장에서의 침투에 혀를 내두르는데, 시작은 공중이 아니라 대놓고 잔디밭을 밟으며 들어가니 ‘어안이 벙벙하다’는 시청자 소감에 필자도 공감한다.
그 외에도 이솜을 비롯해 진경, 노윤서 등 자신의 전작보다 인상 깊은 연기를 한 배우를 찾기 어렵다. 송승헌에 대해서도 발성과 음색을 바꿔가며 심혈을 기울인 연기보다 세월을 비껴간 외모 ‘조각 미남’ 칭찬의 소리가 더 크다. 특히나 노윤서(정설아 역)는 너무 짧은 등장에 혹시나 아버지가 탄광에 근무하기 전에 태어난 슬아(이솜 분)와 달리 그 이후 태어나 ‘사월(강유석 분)이처럼 돌연변이인가, 다시 등장할지 몰라’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키는데 괜한 기대에 불과하다.
그러함에도 <택배기사>의 미덕을 잊지 않는 이들도 많다. 아포칼립스(종말, 대재앙) 이후의 디스토피아 한국, 그중에서도 서울을 중심으로 특정한 인물에 의해 세상이 지배되는 우울한 미래를 그린 사이버펑크 장르를 국내 자본만으로는 구현하기 어려웠는데 비교적 대자본으로 제작됐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 물론 <택배기사>를 보고 나니 2021년 말 우리가 외면했던 영화 <고요의 바다>가 잘 만든 작품이었음을 알겠다는 의견도 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래도 <택배기사>를 볼 이유가 있다. 못 고치는 게 없고 못 만드는 게 없는 만능 과학자이자 사월이와 무쓸모(이주승 분)-멍(정은성 분)-멍멍(이상진 분) 트리오의 보호자인 뚝딱 할배. 배우 김의성을 입을 빌어 뚝딱 할배가 전하는 말을 듣노라면 인생이 무엇인지, 인생에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조금은 알게 되는 느낌이다. 소설 《어린 왕자》 속 사막의 오아시스를 발견하고 갈증 난 인생을 달게 축이는 기분이랄까.
“정신 차리고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저렇게 자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잠은 몸도 마음도 정신도 회복시켜 주는 법이니까.”
“네 마음속에 있는 슬픔이 얼마나 큰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루가 지나면 작아진다, 아주 조금.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나면 조금 더 작아지고. 그렇게 하루하루 작아지는 슬픔을 안고 살아가다 보면 그게 그리움이 되더라. 우린 모두 그렇게 슬픔을 그리움으로 바꿔가며 살고 있는 거야.”
감사한 위로와 힐링의 명언. 대사 자체도 너무나 좋은 말이지만, 나이가 들어도 ‘꼰대스럽지’(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그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남을 가르치려 드는 데가 있지) 않고 청년처럼 사는 배우 김의성이 진심을 담았으되 가벼이 툭 던져 주니 ‘인생의 진짜 원리’처럼 진정성 있게 다가온다. 그냥 막 믿고 싶어진다.
세상뿐 아니라 작품에 왜 ‘어른’이 필요한지, 노장 배우가 콘텐츠에 기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참, 빼먹을 뻔했다. 위의 말들은 각각 사월이를 두고, 사월이에게 하는 말인데. 배우 강유석이 연기한 청춘 사월이가 무겁고 어둡고 느린 드라마에 경쾌함을 선사하는 것도 <택배기사>의 미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