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친아´, ´엄친딸´의 사회학
입력 2008.08.16 10:23
수정 2013.05.22 16:33
<칼럼>엄친아들, 엄친딸의 문화적 심리
옆집 철수 아빠가 무섭다는 말이 있다. "이번에 옆집 철수 아빠는 신형 김치 냉장고 사주었다는데" "철수 아빠는 부장에 진급했다는데..." 이런 말을 듣는 남편들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 옆집 철수 아빠를 모른다고 해도 미울 때도 많다. 남자들의 본성상 경쟁의식을 느낄 수도 있다. 아내들이 그렇게 옆집 남성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남편을 자극하기 위해서다. 남편 자극을 통해서 옆집 처럼 무엇인가를 얻기를 바라는 것이다. 김치 냉장고를 얻든, 남편의 승진을 얻든 말이다. 여기에서 김치 냉장고는 물질적인 소유를 말하고, 승진은 명예를 말한다. 물질과 명예는 행복의 척도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그 행복의 척도는 결국 자신 스스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외부와 비교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개인주의 문화권과 달리 집단주의 문화권에서는 남의 시선을 매우 의식한다. 남의 인정과 평가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다.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을 받으면 자신은 훌륭한 존재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여긴다. 이 때문에 체면과 형식을 중요시 하는 문화가 형성된다. 남들과 적어도 동등하거나 그들을 뛰어 넘는데서 만족감을 느낀다. 그러다보면 정작 자신을 잃어버린다. 명품을 소비하하는 것은 자신이 필요해서라기보다는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고 평가를 듣기 위해서다. 이를 통해 만족감을 느낀다. 집단주의 문화가 강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짝퉁명품이 많아지는 이유가 된다. 또한 다른 곳보다 음악회 티켓값이 비싸진다. 명문대학을 가는 이유는 공부를 열심히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위신을 생각해서다. 그래서 각 고등학교는 입시철 뒤 명문 대학 진학자 명단만 써붙인다.
가족안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벌어진다. ´옆집의 철수는 어느 학교를 갔다더라´ 이러한 말은 자녀들에게 단순히 자극을 넘어 심한 스트레스를 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같은 집단주의 문화권에 있기 때문에 질투와 혐하의 심리를 가지면서도 다른 이들이 인정하는 존재가 되고 싶어진다. 정작 본인도 그러한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을 가지면서도 그렇게 되지 않을 때 분노와 자학이 교체한다.
그러한 집단주의적 문화심리를 반영하는 말이 요즘 유행하는 ´엄친딸´. ´엄친아´라는 신조어이다. 이 말은 엄마 친구의 딸, 엄마 친구의 아들의 줄임말들이다. 공부도 잘 하고, 얼굴도 예쁘거나 잘 생겼으며, 성격도 좋은 엄마 친구의 아들과 딸들을 의미한다. ´엄마 친구 딸은 어느 학교갔는데...´. ´엄마 친구 아들은 대기업에 들어가고, 고시합격했는데, 너는 뭐니...´라는 말들이 대표적일 것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우리 아이보다는 훨씬 뛰어난 이들이다. 물론 이 말은 아들과 딸의 시각이 아니라 엄마의 시각이 중심이다. 어떻게 보면 엄마 자신의 체면과 위신을 생각하는 말이다. 집단주의 문화의 전형적인 소산인 셈이다.
이는 자녀 교육과 가정 운영에서 엄마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거꾸로 드러낸다. 요즘 일부에서 유행하고 있는 ´줌마노믹스´의 한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엄친아´와 ´엄친딸´에는 옆집 철수 혹은 아빠와는 다른 심리가 존재한다. 하필이면 옆집 아이가 아니고 친구의 아이이냐는 것이다. 옆집 철수 아빠는 그야말로 시기와 질투의 대상으로 끝나고 만다. 옆집 철수도 마찬가지다. 옆집은 옆집이기 때문이다. ´옆집´보다 ´엄마친구´는 더 친한 관계를 의미한다. 은근히 내 친구 중에는 이러한 아들과 딸을 이가 있다는 것을 자랑도 하면서 자신의 자녀들을 자극시킨다. 때로는 자신은 본래 그러한 친구들과 같은 반열에 함께 있는 존재라는 점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남편과 자녀들을 잘못 만나서 지금 자신의 현재 처지가 이렇다는 속풀이 심리도 담기기 일쑤이다. 결국 엄마 본인은 그래도 뛰어난 아들과 딸을 둔 친구 때문에 상대적으로 우월하면서 불행한 친구가 된다. 우월한 것은 그러한 친구를 두었기 때문이고 불행한 것은 뛰어난 자녀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 본인은 손해 볼 것이 없다. 엄친아와 엄친딸에는 이러한 이중적 심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한 엄마 본위의 말은 자녀들에게 상처로 남는다.
이러한 신조어를 통해 젊은 층들은 자신의 친구 자녀들과 자신의 자녀들을 비교하는 엄마들의 습성(?) 살짝 비틀고 있다. 자녀들 처지에서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서 상대방을 우월하게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저평가하는 것이니, 기분좋을 리 없다. 스트레스와 함께 그 뛰어난 엄마 친구의 자녀들에 대해서 시기와 질투의 감정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엄마친구의 자녀들과 되고 싶다는 욕망도 일어난다.
남의 ´엄친아´와 ´엄친딸´의 이야기를 들어 스트레스를 받는 등 불편한 감정을 갖는 것보다 오히려 스스로 ´엄친아´와 ´엄친딸´이 되어 남의 귀에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대중적으로 충족시켜주는 것이 대중문화 속에서 엄친딸, 엄친아들이다. 예를 들어 루시드 폴이나 김정훈, 강동원 그리고 박태환, 김연아 등이 꼽히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과 비교할 수 없는 스타로 선망의 대상이 되거나 자신과 동일시되는 대상이다.
하지만 이런 신조어의 남발은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간과하는 것은 아닐까. 대중문화속에서는 웃고 즐길 대상으로 지나치지만, 현실에서는 누군가에게 상처와 고통을 줄 수 있는 말임에 분명하다. 비교대상을 통해 가치평가를 좋게 얻는다고 해도 항상 마음이 허전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평가기준에 맞추기 때문이다. 그럴듯함이라는 것이 끝에서는 자기 소외시켜버린다. 끊임없이 비교의 대상을 통해 상대적인 존재적 가치를 얻고자 할수록 정작 자신은 없다.
데이먼드 리스먼은 근대 이후 현대인이 타인의 평가여부에 강박관념을 갖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집단주의적 문화가 아닌 개인주의적인 문화가 강한 서구라면 엄친아, 엄친딸이 유행할 리가 없다. 다른 이들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과연 중요한 것인가가 중요해야 할터이기 때문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서로 자극을 주어서 분발하게 만드는 것이지만, 우리 사회는 그러한 단순한 유인책으로 움직이기에는 이제 복잡, 다양해졌다. ´엄친아´와 ´엄친딸´의 그래서 씁쓸한 유행어다.
베이징 올림픽이 한참인데, 스포츠 스타들이 탄생할 것이다. ´엄마 친구 아들은 메달을 땄는데 너는 뭐니´하고 말이 없으면 좋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종합 순위에 관계없이, 메달을 따지 않았어도 열정적인 경기를 만들어 냈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