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향하는 이재용·최태원·정의선의 무거운 발걸음 [기자수첩-산업IT]
입력 2023.03.15 11:00
수정 2023.03.15 11:04
강제징용 해법 반대여론 무마할 경제협력 성과 필요
한일 산업구조 감안하면 '실리적 이점' 과시할 아이템 마땅치 않아
국가적 중대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구원투수 역할을 했던 이재용·최태원·정의선은 이번 한일 정상회담에서도 ‘만능 치트키’가 될 수 있을까.
오는 16~17일로 예정된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 일정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등 재계 총수들이 함께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부회장단까지 포함해 사실상 재계 핵심 인사들이 총출동한다.
통상 대통령의 해외 방문 일정에 기업인들이 함께하면 상호 ‘윈-윈’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경제력을 과시함과 동시에 우리 기업들의 현지 투자를 정상회담에서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다.
기업들도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 방문국 현지에서의 사업 기회를 모색하고, 해당국 정부의 적극적인 행정적 지원을 받아낼 수 있는 기회다.
하지만 이번 방일은 온도가 다르다. 일단 정상회담에서의 의제가 무겁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일관계 정상화라는 해묵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제징용 해법’을 내놓았지만, 일본이 아닌 한국 기업들이 재원을 조성해 징용 피해자에게 보상한다는 점에서 국내 여론은 좋지 않다.
그나마 윤 대통령의 행보가 힘을 얻으려면 일본 쪽에서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내놔야 하는데 이 또한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과거사에 대한 새로운 사과나 반성을 표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하다못해 ‘과거는 덮어 두고 미래지향적 관계로 나아가자’는 선언이라도 당위성을 얻으려면 미래지향적 관계를 통해 우리가 뭘 얻을 수 있을 것인지 가시적인 기대효과라도 있어야 하지만, 그것조차 불투명하다.
‘명분적 불리’를 덮을 만한 ‘실리적 이점’을 과시할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는 이들은 기업인이다. 정부간 포괄적 경제협력보다는 기업간 구체적 협력이 현실에 더 잘 와 닿는다. 기왕이면 투자나 경제효과 등 숫자가 언급될 필요도 있다. 상대국 정상이 우리 기업에 대한 우호적 뉘앙스를 보여주는 전시효과도 더해지면 좋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과 일본은 그런 결과물을 내놓기 어려운 관계다. 주력 산업의 상당수가 겹치는 관계로 상호 투자 유치나 집행 대상이 마땅치 않고, 기업들도 서로 경쟁관계에 놓인 경우가 많다.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정의선 회장 앞에서 제네시스 G80 전동화 모델을 극찬한 것과 같은 일도 일본에선 기대할 수 없다. 토요타를 세계 최고의 차로 생각하는 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시다 총리가 아이오닉 5(현대차의 일본 판매모델)에 올라 사진을 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번 정상회담을 앞두고 경제 관련 사안으로 언급되는 부분이 일본의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분야에 대한 수출 규제 철회 정도인데, 이 역시 단번에 정상화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설령 소부장 수출 규제를 철회한들 그걸 엄청난 성과로 포장하기도 힘들다. 애초에 일본의 일방적인 보복 조치였고, 그로 인해 전 국민적 반발이 일었던 사안이다. 그걸 철회했다고 기뻐하거나 고마워할 일은 아니다. 북한이 미사일 도발을 멈춘들 황송해 할 일이 아니듯 말이다.
경제단체들 중 대(對) 일본 창구 역할을 하고 있는 전경련은 이번 한일 정상회담을 양국 관계가 풀리는 계기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15일 산하 연구기관인 한국경제연구원을 통해 일본인 관광객이 10년전 수준 회복되면 국내 경제효과가 5조원을 넘는다는 내용의 조사자료를 낸 게 대표적이다.
앞서 지난달 27일에는 MZ세대의 70% 이상이 한일관계 개선 필요성에 공감했다는 내용의 설문조사 자료를 배포해 정부의 한일관계 개선 노력에 힘을 실어줬다.
한일 정상회담 기간 중인 17일에도 일본 기업단체 게이단렌(일본경제단체연합회)과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을 열기 위해 조율 중이다. 여기에는 전경련 회원사들 뿐 아니라 과거 전경련을 탈퇴한 4대그룹 회장들도 참석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양국 기업인이 모이는 것 자체가 아니라 ‘모여서 도출할 성과’다. 그게 나와 줘야 전경련이 주장해 온 ‘한일관계 개선 필요성’도 힘을 받을 수 있다.
대통령의 다른 해외 방문 일정과 달리 함께 하는 경제인들에게 ‘경제 사절단’이라는 상징적 호칭이 붙지 않는 것을 보면 한일 정상회담의 배후를 장식할 화려한 경제 협력 아이템은 마땅치 않은 듯하다.
이재용, 최태원, 정의선. 이 세 인물은 정부가 정책적 노력만으로 한계에 부딪치는 일이 생길 때마다 어김없이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심지어 반기업 정서가 심한 지지자들을 등에 업은 문재인 정부조차 코로나19, 소부장, 경기침체, 고용 등의 문제가 있을 때마다 이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들이 한일관계 개선에서도 우리 국민들을 설득할 만한 절묘한 수를 내놓을 수 있을 것인가. 가장 가볍게 오갈 수 있는 일본으로 향하는 재계 대표 3인방의 발걸음이 이번엔 유난히 무거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