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효승의 역사 속 장소 이야기③] 중림동 약현성당에 남겨진 대한제국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 흔적
입력 2022.10.18 14:01
수정 2022.10.18 14:25
1907년 8월 서울에서 대한제국군과 일본군 간 전투 벌어져
대한제국 군대의 모습 보여주는 또다른 사진 최초 공개
숭례문에서 마포로 넘어가는 언덕에 오래된 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약현(藥峴)이라는 명칭은 중림동의 옛이름으로 이 언덕에서 약초를 재배했다고 한다. 약현성당은 1892년 건립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고딕식 벽돌 건축물이다. 지금은 고층 건물 때문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언덕 위에 처음 자리잡던 당시에는 서울이 한눈에 잘 보였을 것이다. 덕분에 약현성당에는 한말 일제의 국권 피탈 과정이 직간접으로 남아있다.
일제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점차 강화하였다. 조선군의 저항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신식군대 양성에서 직접 개입하기도 하였다. 결정적으로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재정을 문제로 대규모 감축에 들어갔다.
일제는 조선군과의 정규전을 우려하여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1907년 7월 3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전에 이미 군축에 착수하였다. 1904년 일제는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하면서 대한제국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 그리고 1905년 4월 16일 서울에 주둔한 대한제국 친위대 3,000여명을 해산시켰다. 이어 대한제국의 주력군인 시위대를 5,000여명에서 2,500여명의 혼성시위여단으로 감축하였다. 지방의 주요 도시에 주둔 중이던 진위대 역시 18개 대대에서 8개 대대로 감축하였다. 여기에 편제까지 축소 개편하면서 진위대 병력은 18,000여명에서 2,365명으로 줄어들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보호국화하였다. 해산 군인 등이 의병에 가담하는 등 의병의 저항이 거세지자, 일본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지배하기 위해 한국주차군을 배치하였다. 여기에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등 국권회복 운동이 계속 이어졌다. 일제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7월 24일 정미7조약을 강요하여 체결하였다. 대한제국군이 반발하자 일제는 군대해산을 강행하였다. 이에 서울에 주둔한 대한제국 시위대 등을 시작으로 원주 등 각지의 대한제국 진위대 등이 일본의 국권 피탈에 대항해 본격적으로 무력 저항을 시작하였다.
1907년 8월 1일 서울에서 대한제국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미 이완용 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매국노는 일본군이 서울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일본군은 이들이 열어준 길을 따라 서울을 포위하고, 주요 목을 점령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군은 일제의 해산에 불복하고 저항을 시작하였다.
대한제국군은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저항하였다. 곧 매국노가 열어준 길은 대한제국군의 시체와 이들이 흘린 피로 채워졌다. 대한제국군은 일본군이 포위한 도성을 벗어나 저항을 지속하고자 하였다. 그 과정에서 대한제국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는 서울 도성에서 한강으로 이어지는 주요 지점에서 계속 이어졌다. 현재 약현성당이 자리한 곳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지도를 살펴보면 약현성당이 자리한 곳은 숭례문에서 나와 마포나루 등으로 향할 수 있는 주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이미 용산 일대에 일본군 기지가 자리잡은 상황에서 마포 방향으로 탈출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결국 약현성당 일대에서도 대한제국군과 일본군 간의 교전이 이어졌다. 대한제국군은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지만, 탈출에 성공한 이들은 이후 의병전쟁에 가담하면서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의 무력적 기반을 형성할 수 있었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soothhistory@nah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