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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명대사㉘] 1973년 9·11 칠레…런던에서 온 편지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입력 2022.09.10 11:27
수정 2022.09.10 22:38

영화 포스터 ⓒ 이하 출처=왓챠피디아 홈페이지 내 갤러리


우리가 몰랐던 또 하나의 9월 11일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칠레…

런던에서 사는 50세 가장의 ‘고향 노래’

영국 감독 켄 로치의 2002년 작

11인 감독의 시선 ‘2001년 9월 11일’ 중 6번째 영화



(한 남자가 금세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창가 식탁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다.)


9·11테러로 죽은 분들의 부모님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칠레 사람입니다, 런던에 살죠.

우리에겐 공통점이 있단 걸 말씀드립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아가셨죠, 저도 잃었습니다.

날짜도 9월 11일로 같습니다.

9월 11일, 화요일.


1970년 그날엔 선거가 열렸습니다.

열여덟 살이던 저는 첫 투표를 했죠.

모두 아름다운 꿈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노동의 대가와 나라의 부를

공유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를요.

1970년 9월 선거로 우린 이겼습니다.

아이들에게 식량과 교육이 제공되고

쓰지 않는 땅은 소작농들에게 분배됐습니다.

석탄꽈 구리 광산,

주된 산업은 스스로 꾸려나갔죠.

모두의 삶에 처음으로

존엄성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의 지성을 신뢰합니다.

조직적인 사람들은 지성이 있어요.

사람들의 단체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요.”

(공장 직원의 이야기)


하지만 그 위험성은 몰랐습니다.

미국의 보좌관인 헨리 키신저가 말하길

자국민들의 무책임함 때문에

공산주의 국가가 되어가는걸

지켜볼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죠.

투표라는 우리의 민주적인 결정은 상관없었습니다.

시장과 이윤이 민주주의보다 중요했으니까요.

그 시기부터

우리와 당신들의 고통은 합법화됐습니다.

닉슨 대통령은 우리 경제를 일으키겠다 했죠.

CIA에게 군사 봉기를 조직하라고 합니다,

쿠데타였죠.

천만 달러 아니 그 이상이 필요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대통령을 없앨 수 있었습니다.

살바도르 아옌데를요.

여러분의 지도자가 우리를 파괴하게 한 겁니다.


그들은 운송파업을 일으켜서

우리 경제를 마비시키고,

내수 거래를 중지시켜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우리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들과

함께했죠.

여러분의 돈은

거리에 폭력을 일삼고 공장과 전력소를 폭파하는

네오 파시스트에게 전해졌습니다.

놀랍게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아연예, 국민이 당신을 지킵니다.”(거리의 구호)

“전 칠레인이에요, 전 아옌데의 정부를 지킬 겁니다.

국민의 정부니까요.”(아이 엄마로 보이는 여성의 이야기)

“우리는 지켜낼 겁니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미래를 건설할

우리의 권리를 말입니다.” (연설하는 살바도르 아옌데)


자방 선거에서도 우리의 지지는 견고했습니다.

미국은 뭘 했습니까.


“9월 11일에 자유의 적들은

미국을 상대로 전쟁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한순간 다른 세계가 됐습니다.

자유 그 자체이던 세계가 공격당한 겁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연설)


9월 11일 자유의 적들은

우리나라를 상대로 전쟁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아침이 밝자마자 군대와 탱크가 대통령궁으로 전진했고

아옌데와 측근들은 궁 안에 있었습니다.

아옌데는 모네다궁이 불타도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힘이 있습니다.

우리를 노예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진보는 범죄나 무력으로도 멈추지 않습니다.

역사는 우리 편입니다. 국민이 만들었으니까요.

칠레여 영원하라, 국민이여 영원하라, 노동자여 영원하라.”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의 생전 육성)


그는 살해당했습니다.

그는 살해당했어요.

화요일이었습니다.

1973년 9월 11일.

그날로 우리의 삶은 파괴되었습니다.


(편지를 쓰다 말고 통곡하는 남자.

마치 1980년 5월 광주인가 싶은, 놀랍게도 똑같은 장면들이 흐른다)


전 무릎에 총을 맞았고,

땅바닥에 제 머리를 호되게 박았습니다.

저를 구타했고, 정신을 잃을 때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감옥에서 창살 가까이 가니

독일인이 끌려오는 게 보이더군요.

걷지도 못했고 귀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뼈를 부러뜨려 그를 살해했죠.

그 ‘고문캠프’는 미국의 학교에서 훈련받은

공무원이 운영했습니다.

헬리콥터에서 내던져진 내장이 없는 사람들은

자식과 배우자 앞에서 고문당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한지 아십니까.

성기에 전기를 통하게 하고

여성의 성기에 쥐를 넣고 개한테 겁탈당하게 했습니다.

죽음의 카라반도 알게 됐죠.

잔군이 지역을 돌아다니며

무작위로 처형을 명령했다 합니다.

3만 명이 죽었습니다.

무려 3만 명이요.


주미 칠레대사관에서

고문에 대해 항의하니

미국의 키신저가 대답하길

정치학 강의는 관두라고 했다죠.

쿠데타를 조직한 피노체크 장군은

일을 잘해 낸 대가로

웃으며 미국의 축하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칠레로 달러가 들어왔죠.


당시의 아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로 부르는 파블로(오른쪽).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 ⓒ

그들은 날 테러리스트라 했고

재판 없이 무기징역을 선고했습니다.

5년 뒤에 풀려났지만

친구들의 안전을 위해

나라를 떠나야 했습니다.

(아내와 딸, 아들이 함께 카메라 안에 담긴다)

이젠 돌아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원해도요.

칠레는 제 고향이지만,

제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런던에서 태어났고

저처럼 추방을 명령할 순 없습니다.

지금은 갈 수 없지만

진심으로 고향이 그립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죠.

희망에게는 아름다운 두 딸이 있는데

분노와 용기다.

분노는 지금 상황에 있고,

용기는 그를 바꾼다고요.


9·11테러로 죽은 분들의 부모님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곧 저희의 화요일인 9월 11일이 29주기가 됩니다,

여러분에게는 1주기가 되겠죠.

여러분을 기억하겠습니다.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


파블로 드림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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