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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배우발견㉑] ‘그대 어이가리’ 선동혁, 소리로 전하는 위로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입력 2022.05.03 08:06 수정 2023.03.09 02:12

배우 선동혁 ⓒ이하 영화사 순수 제공


“제 나이 68세, 새롭게 연기에 눈을 떴습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동랑극단, 민예극단 등에서 판소리, 탈춤의 재능을 동적으로 과시하는가 하면 정적이고도 시적인 연기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1980년 연극계 유망주로 떠올랐던 배우이자 1982년 KBS TV문학관 ‘산노을’로 데뷔한 이래 각종 사극과 시대극에서 묵직한 카리스마를 뿜어온 50년 경력의 연기자가 한 말이다.


보통은 연기 변화에 대해 ‘연기 스타일을 바꿨다’고 하거나 ‘방법론을 달리해 봤다’ 정도로 말할 법도 하건만, 이제 갓 데뷔한 신인 같은 눈망울로 배우 선동혁은 말했다. 지난 4월 30일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가 한창인 전주에서 영화 ‘그대 어이가리’(감독 이창열, 제작 ㈜영화사 순수)의 주연배우 선동혁을 만났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연기에 눈을 떴다’고 말하는 걸까.


“메소드연기라고 하죠. 정말 동혁이가 되어 연기했습니다. 다시 연기하라고 하면 다시 할 수 있을까 할 만큼, 캐릭터와 혼연일체가 되는 기쁨을 맛봤습니다.”


아내 곁에 남편이 있듯 삶과 죽음은 공존한다 ⓒ

선동혁은 영화 ‘그대 어이가리’에서 국악 명인이자 치매 걸린 아내 노연희(정아미 분)의 하나뿐인 정인이자 보호자 윤동혁을 연기했다. 캐릭터와 하나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배경과 사연이 있었다.


“촬영 4개월 전부터 배우들과 모여 연극 연습하듯 시나리오를 이해하고 인물을 해석하고 함께 대본을 읽었어요. 촬영이 시작됐을 때는 작품이 제 안에 통째로 들어와 있었고, 대사 NG 한 번 내지 않고 촬영을 마쳤습니다. 우리 영화가 컷 나눔이 적고 한 장면을 한 번에 찍는 롱테이크 샷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함에도 틀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연습량도 있지만, 동혁이가 되어 얘기했기 때문이에요.”


“사실 배우에게 있어 촬영 한참 전부터 그 인물로 살아야 하고, 3~5분에 이르는 장면을 한 호흡으로 가야 한다는 건 고통입니다. 카메라 하나 세워 놓고 장면을 담는다, 그럼 배우는 혼신으로 감정을 표현하면서도 카메라에 비추는 시선 처리, 움직일 때 동선 처리뿐 아니라 얼굴과 몸의 어떤 측면과 부분이 어떻게 담기는가를 다 생각하며 해야 해요. 이 긴 장면이 내게 맡겨져 있다는 책임감이 더해져 내적 긴장감이 고조됩니다.”


말만 들어도 그 무게와 촬영장의 밀도가 느껴져 아찔했다. 그런 순간들을 견딜 뿐 아니라 찐득한 액상이 가득 찬 듯한 공기를 가르며 제 몫을 해내야 하는 게 배우의 숙명이리라.


“그래도 이렇게 긴 호흡으로 오래 영화를 준비하고, 롱테이크 연기를 하고 나니 배우로서 긴 터널을 제 발로 걸어서 통과한 느낌입니다. 연기가 숙성된 느낌도 들고요. 그렇다고 제가 완전히 달라졌다, 새로 태어났다고는 말씀 못 드리겠지만 이후 작품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선동혁이 운동혁이고 윤동혁이 선동혁이었던 그때 ⓒ

작품 외적으로도 동혁이와 동화될 만한 일들이 ‘거짓말처럼’ 존재했다.


“어머니가 촬영 시작 20여 일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보다 한 달여 앞서 장모님이 돌아가셨고요. 특히나 어머니는 연희처럼 치매를 앓으셨습니다. 어머니를 여의고 가슴 한쪽이 무너지는 아픔을 안고 동혁이를 연기했어요, 그래서 더 실감 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랜 준비 기간 속에 완벽한 대기 상태로 촬영에 들어가면 자칫 전형적 연기가 될 수도 있다. 가슴속에 어머니를 여읜 회한을 품고 임하니 ‘날 것’ 같은 연기가 나왔다. 메소드연기는 극사실주의 연기와 맥을 같이 한다.


선동혁은 영화 속에서 다양한 우리의 소리, 특히 남도소리를 부른다. 진도씻김굿 길닦음 대목을 민살풀이 춤사위 속에 부르기도 하고, 상여소리(만가)를 부르는데 분명 아내의 맺힌 응어리를 풀어 하늘로 보내는 진혼곡이건만 어쩐지 꼭 연희만을 위한 노래로 느껴지지 않는다. 어머니와 장모를 보내는 노래였던 것이고, 나아가 ‘잘살고 있니’ ‘힘들어도 버텨 보자’ 우리를 토닥이고 위로하는 노래다.


상여소리 하는 동혁 아버지 역도 함께 연기한 배우 선동혁. 실제로 선동혁의 외할아버지가 상여소리를 하던 분이다 ⓒ

“상여소리를 하셨던 외할아버지, 소리 잘하셨던 어머니의 소리도 늘 제 핏속에 녹아있습니다.”


데뷔 이후 45년간 틈틈이 배우로서의 재능을 연마하기 위해 소리와 춤을 배워온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그 원류에 외가의 음악 DNA가 있었다. 영화 ‘그대 어이가리’에서 동혁은 상여소리 잘하는 윤종률과 곡소리 잘하는 어머니의 아들이고, 선동혁은 윤종률과 아들 동혁을 1인 2역으로 연기했다. 현실에서도 상여소리 하는 가인의 손주이고 소리 잘하는 여인의 아들이다. 모든 게 깊은 ‘연’으로 연결돼 있고 ‘그대 어이가리’와의 인연은 3대를 이은 가업이 만개하는 운명처럼 다가온다.


“명창 신영희 선생께 판소리를 3년 정도 배웠고요. 박병천 선생께 진도씻김굿과 다시라기굿, 구음, 상여소리를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꾸준히 남도 육자배기, 흥타령, 민요 등을 공부해 왔고. 이번에 늦은 나이에 선보일 기회가 되었죠.”


준비된 배우는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는다. 반백 년을 갈고닦은 재능이 영화 내내 빛을 발하는데, 특히나 엔드크레딧이 올라갈 때 영화를 본 우리를 배웅하듯 읊조리는 구음은 백미다.


“구음입니다. 살풀이 구음이라고도 하죠. 우리나라에서 구음 살풀이의 명인인, 작고하신 진도씻김굿 인간문화재 박병천 선생께 30년 전쯤에 직접 배운 겁니다. 마지막까지 귀담아 들어주셨다니 좋네요.”


하얀 모시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민살풀이 춤사위 속에 진도씻김굿 길닦음 대목을 불러 우리의 상처와 힘겨움을 어루만진 배우 선동혁 ⓒ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더니 겸손하다. 전 세계 영화제들에서 39개(2023년 3월 기준 51개)의 트로피를 받고, 그 가운데 5개는 자신의 힘으로 보탠 것에 대해서도 선동혁은 공을 두 어머니께로 돌렸다.


“칸인디시네마페스티발, 미국남부영화예술아카데미페스티발, 오대륙국제영화제, 뉴욕독립영화제, 영국런던뉴웨이브필름페스티벌에서 주연상을 받았습니다. 마치 어머님, 장모님 두 분이 손잡고 저세상에서 도움을 주시는 것 같아요. 우리 영화 잘되도록요. 해외영화제도 좋지만, 우리 관객들께서 관심 가져 주시고 살펴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문희, 윤여정, 오영수, 김영옥…, 아름다운 황혼을 보여주는 배우들이 연이어 등장하고 있다. 그 대열에 선동혁이 함께하기 시작했다. 마치 신인의 차기작을 기다리듯, 다음 작품을 고대한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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