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날, 읽을 수 없는 세상 ①] "어떤 음료, 무슨 생리대인가요?"
입력 2022.04.20 05:07
수정 2022.04.19 23:13
아직도 사회 곳곳에서 시각장애인의 불편 야기…"우유 유통기한 몰라 낭패"
"남자 직원에겐 물어보기도 민망한 여성용품, 잘못 구매하거나…샴푸 대신 로션 바르기도"
"해열제·감기약·연고 등 일상의 의약품들에 점자 없어 아파도 약 복용 못하고 오용 위험까지"
"지난해 6월 약사법 개정으로 안정상비의약품엔 점자 표기 의무화…다른 품목으로 확대 필요"
4월 20일. 올해로 벌써 마흔 두 번째 장애인의 날을 맞았지만, 장애인들에게 우리 사회는 여전히 녹록지 않다. 특히 생리대, 세제, 의약품 등 생활 필수품 살 때 시각장애인들의 불편함은 배가된다.
현재 서울 주요 편의점에서 점자가 있는 물건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일부 캔 음료와 페트병으로 된 탄산음료, 생수 등을 제외하곤 점자가 표기된 상품은 찾기 어렵다. 비장애인에게는 친절하게 업체명과 성분까지 알려주고 있었지만, 시각장애인들이 손으로 읽을 수 있는 점자 설명은 없는 것이다. 음료의 경우 탄산음료, 우유, 커피 등 다양한 종류가 나오지만 '탄산' 또는 '음료'라고만 적혀 있다.
시각장애인 김훈(50)씨는 "음료를 구매할 때 점원에게 어떤 음료인지 물어보고 구매를 할 수는 있다"며 "다만 구매 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마시려고 꺼낼 때 하나하나 점자가 표기돼 있지 않아 어떤 음료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대부분 어떤 음료인지 적혀 있지 않고 음료라고만 적혀있다"고 말했다. 특히 "우유 등 유제품은 유통기한이 가장 중요한데 유통기한은 점자로 적혀 있지 않아 유통기한을 알 수 없다"고 토로했다.
김 씨는 "문화체육관광부 고시에 보면 점자의 물리적 규격이 정해져 있지만 업체마다 줄 간격, 높이, 지름 등이 달라 읽을 수 없는 것이 많다"고 덧붙였다.
시각장애인들은 여성용품을 살 때도 어려움을 겪는다. 대부분 비닐 포장에 낱개로 포장돼 있고 점자는 표기돼있지 않다. 생리대가 중형인지 대형인지 어떤 회사에서 만든 제품인지도 알기 힘들다. 구매가 어려울 때는 어쩔 수 없이 점원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남성 직원이 있을 때는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시각장애인 심모(59)씨는 "생리대의 경우 중형인 줄 알고 샀는데 대형일 때도 있고, 잘못 구매한 적도 있다"며 "가족들의 도움으로 구매하면 좋지만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경우나 점원이 남자인 경우 민망해서 물어보기가 어렵다"고 전했다.
그는 "샴푸인 줄 알고 짜서 머리에 발랐는데 로션인 경우도 있다"며 "빨래할 때 사용하는 섬유유연제와 세제에 점자가 표기돼 있지 않아 섬유유연제만 넣고 세탁기를 돌리는 일이 흔하다"고 밝혔다.
시각장애인 A씨는 "아이가 먹을 해열제나 감기약을 냉장고에 넣어뒀는데 점자가 없어서 잘못 먹인 적이 있다"며 "어떤 약에는 고무줄 1개 또 다른 약에는 고무줄 2개를 묶어 스스로 구분하는 원시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고 한숨을 지었다. 그는 "다쳤을 때 바르는 연고의 경우 한 번 쓰고 버리는 게 아닌데 종이상자에만 표기가 돼 있고 내용물에는 개별적으로 점자가 표기돼 있지 않아 아파도 약을 못 바르고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는 일이 허다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의약품은 점자가 없으면 오용의 위험이 있다. 이 때문에 점자 의무 표시가 가장 시급한 할 품목으로 지적됐다. 지난해 6월 약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오는 2024년 7월부터는 안전상비의약품에는 반드시 점자를 표기해야 한다. 한국시각장애인총연합회 관계자는 "약사법 통과까지도 10년이 걸렸고, 이제 막 한 걸음을 뗐다고 보면 된다"며 "시각장애인에게 점자는 상품 광고와 같다. 점자 표시를 확대하는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