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헬로스테이지] 이토록 매력적인, 황정민의 惡… ‘리차드3세’
입력 2022.01.22 14:07
수정 2022.01.22 11:07
2월 13일까지 에술의전당 CJ토월극장
황정민 2018 초연 이어 4년 만에 귀환
장영남·윤서현도 합류
“날 봐. 좋은 핏줄로 태어났지만 거칠게 만들어졌지. 아무렇게나 찍어낸 듯 뒤틀린 모습. 나는 이 순간부터 훌륭한 배우가 되겠어.”
잔뜩 굽은 등, 뒤틀린 팔, 그 아래로 덜렁거리는 쪼그라든 손가락. 걸음걸이는 또 어떤가. 거의 90도로 굽어진 무릎을 한 채 한쪽 다리를 절면서도 무대 곳곳을 활보한다. 거기에 잔인하고 교활한 성격까지 갖췄다. 그런데 이 ‘잔인하고 악한 추남’은 어쩐지 미워할 수가 없다. 아니, 오히려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연극 ‘리차드3세’의 주인공이기도 한 곱사등이 왕, 리차드 글로체스터의 이야기다.
지난 11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리차드3세’는 셰익스피어가 1583년경 쓴 초기 희곡이다. 영국 장미전쟁을 배경삼아 15세기 요크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실존인물 리차드3세(1452~1485)의 왕좌를 향한 광기어린 폭주를 그린다. 곱추에 절름발이 추남으로 태어난 글로스터 공작이 신체적 핸디캡을 증오로 불태우며 권력욕에 눈뜨게 되고, 갖은 중상모략과 권모술수로 ‘왕좌의 게임’에서 승리하지만 금세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는 이야기다.
배우 황정민은 지난 2018년 초연에 이어 4년만에 돌아온 이 작품에서 주인공 글로스터 공작으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앞서 초연에서도 황정민은 주인공을 맡아 객석 점유율을 98%까지 높인 바 있다. 사실 악랄하고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글로스터 공작을 ‘매력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건, 황정민의 신들린 연기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황정민은 극중 “훌륭한 배우가 되겠다”는 리차드의 말처럼 “유쾌하게 엄격하게 사랑스럽게 또 마초적으로. 세상을 속일 명연기”를 펼친다.
무대 위에서 황정민을 리차드로 꾸며주는 장치는 오직 곱사등이 분장뿐이다. 오로지 연기 하나로 리차드3세가 된다는 말이다. 리차드의 결핍, 트라우마를 먼저 강조하면서 연민을 이끌어내고, 익살을 떨어대며 관객을 제 편에 세운다. 적당히 인간적이고 적당히 유머러스한 리차드의 매력적인 모습은, 또 금세 얼굴을 바꾸고 서늘한 공포로 관객을 몰아세우기도 한다.
셰익스피어가 쓴 시적인 대사가 주는 말맛도 매력적이다. 특히 황정민이 “기가 막힐 정도로 공감이 가는, 딱 요즘 시대 이야기”라고 평한 것처럼, 지금도 변치 않는, 시대를 관통하는 묵직한 메시지는 고전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무대의 화려함 보단, 배우들의 연기와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힘이 강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작품의 여운이 긴 것도 이 때문이다. 작품은 요크가의 손에 가족을 잃은 마가렛 왕비(소리꾼 정은혜)의 입을 빌려 “그대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 그대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라고 시종일관 질문을 던진다. 리차드3세를 향해 있던 그 질문은, 어느새 관객을 향하면서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한다. 2월 13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