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n번방 수요자도 공개되나…불법촬영물 보거나 사는 사람도 신상공개 추진
입력 2021.12.15 05:07
수정 2021.12.15 11:35
경찰 "공급 차단과 수요억제 동시에 이뤄져야 확산 방지"…관계부처와 협의중
대다수 시민들 "수요자도 신상공개 될 수 있다는 경각심, 범죄근절에 도움" 기대
여성학계 "불법촬영물 조회수 60만도 넘어…공범으로 봐야"
법조계 일각 "법적 근거 부족해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나고 실효성 보장도 어려워"
경찰이 성착취물을 제작해 공급한 사람뿐 아니라 구매하거나 시청한 이들에 대해서도 신상공개 여부를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 확산을 막자는 취지에 공감하는 대다수 시민들과 여성학계는 즉각 환영하며 수요자 신상공개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법조계 일각에서는 법적 근거가 부족해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제도의 실효성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13일 성착취물 수요자도 요건에 부합한다면 신상공개심의위원회 거쳐 신상을 공개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디지털 성범죄 확산을 확실하게 막으려면 공급 차단과 함께 수요 억제가 동시에 이뤄질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경찰청은 국무조정실 주재로 행정안전부·금융위원회·방송통신위원회 등과 협의하고 있고, 각 부처에서도 안건 검토에 착수했다.
현행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특강법)에 따르면 특정강력범죄나 성범죄를 저지른 '피의자' 중에서 범행 수단이 잔인하고 그 죄를 범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을 때, 또 국민의 알 권리 보장과 재범방지 등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상황일 때 얼굴이 공개된다. 경찰이 지난해부터 총 8명의 디지털 성범죄자 신상을 공개했는데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 등 공급자가 주를 이뤘다.
경찰은 성착취물 피해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공급자뿐만 아니라 아니라 수요자에 대한 억제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지난 3월 '사이버성폭력 불법유통망·유통사범 집중단속'을 벌여 총 1625명을 검거했는데 이 가운데 구매하거나 시청한 수요자가 706명(43.4%)에 달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대체로 제도 취지에 공감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서울 강동구에 사는 직장인 송모(29)씨는 "불법촬영물을 찾는 수요가 끊이지 않으니 공급도 있는 것"이라며 "수요자들도 신상공개 대상이 될 수 있다면 경각심이 보다 커질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전했다.
서울 동대문구에 사는 취업준비생 한모(26)씨도 "불법촬영물은 한번 유포되면 영원히 삭제되기 어려운데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라도 이를 찾는 수요자에게 엄격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엄벌을 요구해온 여성학계에서도 환영한다는 입장이다. 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대표는 "어떤 피해 촬영물의 경우는 조회수가 60만건에 달할 정도로 아직 불법촬영물을 찾는 이용자가 많다"며 "단순히 보거나 검색하는 것만으로 형사처벌을 넘어 신상공개가 되는 분위기는 불법촬영물 유통이 근절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허민숙 입법조사처 조사관(여성학 박사)도 "디지털 성범죄는 피해자 신상을 공개하는 방식으로 피해를 키웠는데, 이젠 가해자들 역시 역으로 신상이 공개될 수 있다는 경고가 필요할 때"라며 "미국에서는 실수로 불법촬영물을 클릭한 사람들의 명단도 FBI로 넘어간다"고 밝혔다.
허 조서관은 이어 "시장에서 공급자들이 맹위를 떨칠 수 있는 건 이를 찾는 수요자들 때문인 만큼 수요자들도 디지털 성범죄를 가능하게 한 공범으로 보고 신상공개 대상 검토를 추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다만 법조계 일각에서는 불법촬영물 수요자 신상공개는 법적 근거가 부족해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세부기준 없이 계획만 세우면 논란만 더 양산되고 제도의 실효성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대근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법무정책실장은 "피의자 신상공개 요건을 규정해 놓은 특강법, 성폭력 처벌법에 따르면 불법촬영물을 단순히 저장하거나 시청한 행위는 신상공개 대상 범죄에 아직 해당되지 않아 현재로서는 그 자체로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난다"며 "따로 입법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수요자 신상공개보다는 범죄자들에 대한 확실하고 엄격한 처벌이 범죄 예방에 보다 효과적이다"라고 강조했다.
익명을 요구한 법조계 관계자도 "디지털 성범죄의 주동자와 가담자의 죗값이 다른데 동일 선상에 놓는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며 "얼마나 집요하고 지속적으로 불법촬영물을 이용했는지 등 세부기준 없이 무작정 계획만 가지고 있다면 논란만 더 양산되고 제도의 실효성을 보장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실제 경찰 신상공개심의위원회에서 불법촬영물 구매자에 대해 신상공개 결정을 내렸으나 법원이 불가하다고 판단한 사례가 있다. 지난해 7월 2일 강원지방경찰청은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구매한 30대 남성 A씨의 신상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A씨는 "경찰의 신상공개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신상공개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