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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서거] 선거로 뽑혀 선거로 물러난 첫 대통령…'민주주의의 연착륙'

정도원 기자 (united97@dailian.co.kr)
입력 2021.10.27 01:02 수정 2021.10.27 01:02

직선제 선거로 집권해서 선거 통해

선출된 후임자에 정권이양 첫 사례

6·29 선언…"직선제로 정면승부"

민정당 대표최고위원을 맡고 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87년 6월 29일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시국수습대책 8개 항이 포함된 이른바 6·29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26일 서거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으로 '선거로 선출돼 선거로 물러난' 대통령이다. 노 전 대통령은 1987년 대선에서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누르고 당선돼 5년 단임의 임기를 마친 뒤, 1992년 대선에서 선출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퇴임했다.


이는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의 사례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선거로 선출됐으나 4·19 혁명으로 퇴임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해 10·26 사건으로 재임 중 서거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최초로 선거를 통해 선출된 후임자에게 정권을 이양하는 방식으로 퇴임하기는 했지만, 집권은 12·12 사태와 이른바 '체육관 선거'를 통해 권좌에 올랐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87년 6월 29일 발표된 6·29 선언을 통해 직접 직선제 대선의 계기를 만들고 이를 통해 집권했다. 4월 1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후임 대통령을 당시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간선제로 선출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자, 정국의 혼란과 민심의 동요는 극에 달했다.


당시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대표최고위원이던 노 전 대통령은 이만섭 국민당 총재 등과의 회동에서 "또다시 장충체육관에서 대선을 한다면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할 것"이라며 "직선제 개헌을 통해 정면승부를 걸라"는 조언을 듣고 이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것으로 알려졌다.


직선제 개헌을 하겠다는 6·29 선언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주도로 이뤄졌다는 게 중론이지만, 그 경우에도 직접 대선에 나갈 '선수'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이를 수용해야만 했는데 노 전 대통령도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6월 29일의 특별시국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전 대통령 사면·복권 △언론의 자유 보장 등 8개 항을 직접 발표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민정당 대표를 포함한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전 전 대통령은 이튿날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해 이를 받아들였다.


87년 '1노3김' 대선에서 승리…집권
"야당의 캐치프레이즈는 군정종식
나는 군정종식 징검다리 역할 강조"


민정당 대선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87년 13대 대선 선거운동 당시 제주시 종합운동장 야외광장에서 열린 유세현장에서 지지자들에게 인사를 하며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후 개정된 현행 헌법에 따라 노태우 전 대통령은 민정당의 대선후보로 13대 대선에 출마, 이른바 '1노3김 구도'에서 당선됐다.


대구 출신인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지역적 기반인 대구·경북 뿐만 아니라 인천·경기와 강원·제주, 충북에서도 1위를 하며 36.6%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는 28.0%,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27.0%를 득표했다.


'민주화 세력'인 양김 씨의 득표를 합하면 55.0%로 노 전 대통령보다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구도' 속에서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이를 어부지리라 평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다. 양김 씨의 단일화가 결국 이뤄지지 않도록 전략을 구상하고 선거전을 이끌어간 것 역시 정치력이기 때문이다.


당시 대선 전략에 관한 노태우 전 대통령 회고록의 서술을 보면, 노 전 대통령 본인은 비록 군인 출신이지만 문민(文民)으로의 정치 이양이라는 시대적 흐름 자체는 정확하게 읽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노 전 대통령은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에서 15장(章) 전체를 '13대 대통령 선거'에 할애했다. 이 대목에서 노 전 대통령은 "야당에서 내건 캐치프레이즈를 분석해 보니 그들의 가장 큰 무기는 군정종식(軍政終熄)"이라며 "대응 방안을 궁리한 끝에 군정종식을 부정하지는 않되, 군정을 종식시키는 징검다리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로 했다"고 기술했다.


대선 기간 중 "군 출신 대통령은 내가 마지막이 되도록 하겠다"고 공약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자신이 총재로 있는 집권여당의 후임 대선후보로 문민 출신 김영삼 전 대통령을 선출함으로써 군정종식을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실제로 했다.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창당한 집권 민주자유당은 대선후보 경선 선거인단인 대의원의 비율을 민정계 50%, 민주계 30%, 공화계 20%로 정하고 있었다. 민정계 소속으로 군 출신인 박태준 최고위원과 이종찬 의원, 김복동 의원 등이 차기 대권을 노리고 있기도 했다. 노심(盧心)이 민정계 소속 군 출신 인사에게 있었다면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당내 경선에서 승리하기는 어려운 구조였다.


권력승계구도, 문민 김영삼으로 정리
민정계 군 출신 박태준 출마 주저앉혀
"우리나라 쿠데타 할 수 없는 구조 돼"


민자당 총재를 맡고 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2년 5월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대선후보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선출되자 함께 손을 맞잡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은 사실상 후계 구도를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 정리했다.


당시 경향신문 정치부 기자로 민자당을 출입했던 무소속 이용호 의원의 '권력의 탄생'에 따르면, 1992년 4월 8일 청와대 만찬 회동에서 김종필 최고위원이 "3당합당시 합의된 것은 아니지만 암묵리에 다음은 YS라는 공감이 있었던 것 아니냐"며 "총재가 특별히 다른 생각이 없다면 나는 그 정신에 따를 생각"이라고 넌지시 묻자, 노 전 대통령은 "선배가 그렇게 말한다면 굳이 내 의중을 밝힐 필요도 없겠다"고 화답했다.


민정계 소속인 허주(虛舟) 김윤환 의원을 통해 "노대통령은 더 이상 군 출신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메시지를 박태준 최고위원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박태준 최고위원이 대권행보를 계속하자 마침내 4월 16일 박 최고위원과의 통화에서 "(군 출신이 대통령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그거 모두 다 내 뜻"이라며 "모든 것을 신중하게 처신해줬으면 한다"고 압박했다. 박 최고위원은 이튿날 민정계 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 경선 출마 포기를 선언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래 사반세기 동안 군정이 이어지던 1987년 대선에서 갑자기 '민주화 세력'인 양김 씨 중의 한 명이 당선됐다면,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신군부가 전격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것처럼 다시 군사정변이 터졌을 수 있다는 관측이 있다.


야권의 유력 대권주자 국민의힘 홍준표 의원은 최근 데일리안과의 인터뷰에서 "지금 미얀마를 보라. 또 태국을 한 번 보라. 심심하면 쿠데타가 일어나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는 나라"라며 "1993년에 김영삼 대통령이 하나회 척결을 하면서 군내 사조직을 일소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쿠데타를 할 수 없는 구조가 됐다"고 평가했다.


결국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군정종식을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이후 1992년 대선에서 집권여당 대선후보로 나선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당선돼 하나회 등 옛 군부 세력을 척결함에 따라 우리나라는 상시적인 군사정변의 위협에서 벗어나 절차적 민주주의가 자리잡게 됐다. 이런 점에서 노 전 대통령의 집권기는 '민주주의 연착륙'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는 분석이다.

정도원 기자 (united97@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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