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캐릭터탐구⑱] 21세기 로마의 휴일 ‘달리와 감자탕’
입력 2021.10.10 08:25
수정 2021.10.10 09:08
방영일을 기다리는 드라마가 생겼다. 내가 먹을 음식에 누군가 시간과 노력의 정성을 쏟아주면 참으로 대접받는 느낌이 들 듯 제작에 공을 들인 드라마, ‘달리와 감자탕’(연출 이정섭, 극본 손은혜·박세은)이다.
소소한 정성부터 얘기하자면 주인공이 뒷걸음질 칠 때 ‘끼익’ 브레이크 밟는 소리, ‘쁘드드드드’ 공기가 얼어붙는 머쓱한 분위기를 전달하는 소리 등 다양한 효과음으로 실감을 높이고 재미를 보탠다. 이번엔 또 어떤 소리가 나올까, 은근히 기대하고 기다리는 맛이 있다.
음악도 너무 좋다. 발라드나 클래식은 기본, 힙합도 드라마에 썩 잘 어울릴 수 있음을 들려준다. 주인공의 감정이나 상황을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효과는 당연하고, 노래가 좋아 OTT(Over The Top, 인터넷TV)로 노래만 듣기도 한다. 선곡에 정성을 기울이면 태가 톡톡하다.
간간이 호흡이 느린 장면이 있는 것도 좋다. 줄거리 전개는 빠르되 주인공의 감정을 우리가 충분히 공감해 주기를 바라는 장면에서는 드라마의 숨이 길어진다. 무턱대고 주인공이 우는 얼굴에 오래도록 카메라를 들이대는 게 아니라 주인공을 지나 뒷걸음질하며 뒷모습을 비추고 선다. 감정을 충분히 느끼는 시간도 되고 시청자가 한숨 돌리는 쉼표도 된다. ‘빨리빨리’ 살아야 하는 세상에 가끔은 필요한 템포다.
잔혹함과 폭력성이 과다한 드라마가 즐비한 요즘, 청량한 멜로와 귀여운 코미디가 주라는 사실도 매력이다. 마치 20세기 영화 ‘로마의 휴일’의 21세기 드라마 버전 같은 설정이 흥미진진하다.
왕실을 뛰쳐나온 앤 공주(오드리 헵번 분)가 궁 밖 실정에 무지해 곤란에 처하고 세상살이에 빠삭한 신문기자 죠(그레고리 펙 분)가 이를 돕듯, 빚투성이 비운의 상속녀가 된 김달리(박규영 분)를 제일 잘하는 게 돈 버는 일인 돈돈감자탕 상무 진무학(김민재 분)이 돕는다. 앤과 죠가 사랑에 빠졌듯 달리와 무학도 그리될 것을 알지만 어떤 계기와 에피소드로 이어질지 지켜보게 하는 힘이 있다. 콩쥐팥쥐, 신데렐라 이야기가 계속 만들어져도 새로이 재미있는 것과 비슷하다.
‘달리와 감자탕’의 주인공들을 만나볼까. 먼저 달리는 도심 속에 휴식처를 만들려는 철학을 지닌 청송미술관 집안의 딸로, 혼탁한 세상과 담쌓고 예술에 쌓여 자란 ‘청송캐슬의 공주’이다. 세상 돌아가는 현실을 모르는 달리의 이름도 20세기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에서 따왔다.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졸지에 각박한 현실에 내던져졌다.
배우 박규영은 기품 있는 귀족 같으면서도 따뜻하고, 온실 속 화초 같으면서도 강단 있는 달리를 잘 표현하고 있다. 워낙 딕션(정확성과 유창성을 두루 지닌 발음)이 좋고 기본기가 탄탄한 데다, 앤 공주를 연상시키는 머리 모양과 의상의 소화력도 훌륭하다.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 출연 분량이 상대적으로 적어 아쉬웠던 시청자라면 이번엔 만끽할 수 있다.
남자 주인공은 감자탕을 돼지 뼈로 만드니 돈돈(豚豚), 입만 벌리면 돈 돈 해서 돈돈, 캐릭터에 딱 맞게 돈돈감자탕을 운영하는 돈돈F&B의 상무이자 실질적 대표인 진무학이다. 이름 무학(無學)처럼 배움이 없고 무식하다. 영어나 사자성어를 모르는 건 당연, ‘중이 제 머리를 못 깍는다’는 속담을 ‘중이 제 머리를 못 감는다’로 알고 있고 ‘생선회’를 ‘생선홰’로 잘못 적기 일쑤다. 그래도 돈이 되는 일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감이 좋고 결단력과 추진력이 좋다. 입으로만 군림하는 상사도 아니다, 부지런하고 솔선수범한다. 부자라고 해서 돈을 허투루 쓰지도 않는다. 전등 하나도 이유 없이 켜지 않을 만큼 돈을 아낀다.
배우 김민재는 목청도 크고 감정 표현도 큰 진무학을 능수능란하게 반죽하고 있다. 선이 굵고 시끄러운 배역은 자칫 과한 연기로 보이기 쉬운데, 적절하게 강약 조절을 잘한다. 심지어 고고한 달리가 마음을 뺏길 매력마저 시원시원하게 발산하고 있다. 잔꾀도 반칙도 없는 담백함에 무식함마저도 귀엽게 느껴진다.
진무학은 무식해도 걱정 없다. 그의 곁에는 유식하면서도 상사를 깍듯이 모시고, 무학보다 상황 파악 빠르고 정확한 여미리가 있다. 진무학이 ‘여비서’라고 부르는데 사라져야 할 성차별적 표현이 아니라 여 씨이기 때문이다. 여자 비서인데 차림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남자 정장이다. 조폭 같아 보이지만 섬세한 마음의 소유자인 돈돈감자탕 직원들과 무학 사이에 서 있어도 전혀 튀지 않는다.
배우 황보라는 여미리를 통해 반전의 모습을 동시다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치 무학을 자식처럼 아끼고 살피는 모성을 보여주는가 하면 조폭 넘버2 같은 거침을 과시한다. 멀쩡히 정극 연기를 하는 듯하다가 일순간 코미디 연기를 한다. 목청 높은 김민재 옆에서 소리를 키우진 않지만 다양한 표정과 손짓으로 표현을 풍부히 한다. 자칫 롤러코스터 연기는 산만해 보일 수 있는데 밀고 당기고, 늘리고 줄이기를 맛깔나게 조절해 연기의 디테일을 관찰하게 한다.
‘달리와 감자탕’에는 이 밖에도 다양한 인물과 연기력 탄탄한 배우들이 방사형으로 포진해 있다. 각 인물에 스토리가 부여돼 있고 카메라도 골고루 돌아가서 주연 몇에 나머지 들러리가 되는 구조가 아니라 드라마가 더욱 생생하고 현실감 넘친다. 조·단역까지 캐스팅에 공을 들인 보람이다.
덕분에 김민재-박규영-권율(장태진 역)이 로맨스의 축으로 주변에 여러 삼각멜로의 잔가지를 뻗고 있고, 김민재-황보라를 축으로 유쾌함이 생산되는 가운데 진백원(안길강 분)-소금자(서정연 분) 부부 등 드라마 전반에 웃음이 흐른다. 우희진은 얼굴만 그대로인 게 아니라 변함없이 자연스럽고 편안한 연기로 드라마를 채운다.
구석구석 마음을 쓴 ‘달리와 감자탕’은 매주 수·목 저녁 9시 30분 KBS1에서 볼 수 있고, OTT 웨이브(wavve)에서도 볼 수 있다. 6회까지 방송된 터라 연휴를 통해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