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캐릭터탐구⑬] ‘해고 전담’ 문소리 VS ‘가전 전문’ 정재영 (미치지 않고서야)
입력 2021.07.14 14:23
수정 2021.10.11 07:47
연쇄살인, 출생의 비밀은 없다. 형사, 검사, 조폭, 재벌이 주인공도 아니다. 심심하겠다고? 배우 정재영, 문소리가 나온다. 오, 영화냐고? 드라마다.
게다가, 시청료 받는 KBS 드라마일 것 같지만 MBC 수목드라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냐고? 2년 전 방영된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도 MBC였다.
조미료 듬뿍 뿌린 드라마에 지쳐서 ‘미치지 않고서야’를 보기 시작한 건 아니다. 주연배우 이름만으로도 볼 이유는 충분하다. 문소리, 정재영은 연기에 흠결을 찾기 어려운 배우들인데 더욱 좋은 건 군더더기가 없다. 뿐인가. 안내상, 박원상, 박성근, 신정아, 조복래, 김남희, 김중기 등 연기파 배우들이 조연으로 포진해 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 배우들이 한꺼번에 한 드라마에 나온다. 연기를 있는 듯 없는 듯, 하지 않는 듯, 한다. 정말 잘하면 포장이 필요 없고 과장도 하지 않는다.
일부러 더 팍팍하게 찐 고구마와 탄산 가득한 사이다를 오가는 드라마를 즐겨 보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 끝에는 꼭 ‘미치지 않고서야’ 같은 드라마를 보는 게 좋다. 간 센 양념갈비 먹고 나서 깔끔한 평양냉면으로 입속을 개운하게 하듯이. 당연히 일품요리로 먹어도 된다. 평양냉면, 이 무더위에 어딘가 품위 있어 보이는 요리다. 육수부터 정성껏 우려 얼리고, 면발도 가지런히, 과하지 않지만 노랗고 하얀 삶은 달걀 반쪽에 초절임 오이와 무를 올려 눈까지 시원하지 않은가.
명인이 만든 평양냉면 같은 명배우들의 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는 신선하다. 지난 2013년 된 방영된 드라마 ‘직장의 신’에서 만능으로 무엇이든 잘하는 미스 김(김혜수 분)을 통해 총무부가 주목받은 적은 있지만, 인사부를 드라마 전면에 세우니 새롭다. 인사고과 취합하고 부서발령 공고 내는 부서인 줄 알았더니 인재를 들이고 유출을 막고, 인원 구조조정과 회사 매각에까지 발을 맞추는 핵심 부서다. 그 중심에 당자영 팀장(문소리 분)이 있다.
여기에 극 중 국내 3위의 한명전자 생활가전사업부를 또 하나의 축으로 세운 것도 신선도를 높인다. 각종 가전제품의 개발 스토리가 곁들여지는 가운데 로봇청소기 대 무선청소기의 부서간 대결로 보는 재미를 더한다. 로봇청소기 쪽에는 한세권 팀장(이상엽 분), 무선청소기 쪽에는 노병국 팀장(안내상 분)이 포진해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린다. 추억의 드라마 ‘카이스트’(1999년 1월~2000년 10월 방영)를 연상케 하는 대결들도 있어 흥미진진하다.
정재영은 어디에 속하느냐고. 그는 전설적 디스플레이 개발자 ‘최반석 수석’이었지만, 그가 근무하던 진하시(가상 지명) 디스플레이사업부가 당자영 본사 인사팀 차장의 손에 공중분해 된 뒤, 그나마 최고의 실력 덕에 창인시 생활가전사업부에 자리를 얻었다. 처음엔 한세권 팀장이 이끄는 개발 1팀에 배치됐으나, 자신보다 잘난 사람 꼴을 못 보는 출세지향형 한세권에 의해 축출된다. 한승기 사장(조복래 분)의 8촌 친척인 한세권의 뜻대로 인사팀으로 발령이 나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꾹 참고 ‘최반석 인사부장’ 자리를 받아들인다.
최반석 부장은 안으로는 자신을 ‘굴리는’ 인사팀장 당자영과 싸우고, 밖으로는 이미 떠나온 개발1팀장 한세권과 날을 세운다. 한세권 팀장과는 아직은 업무적 대립각이지만, 장차 당자영을 사이에 두고 겨룰 것으로 예상된다. 당자영은 한세권의 전 부인인데, 한세권은 어쩐지 미련이 남아 있는 듯하고 최반석은 시나브로 윗집 사는 당자영에게 마음이 기울고 있다.
최반석과 한세권은 극과 극 캐릭터다. 최반석이 원리원칙주의자이고 후배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가늘게 길게 가자는 마음으로 직장생활을 한다면, 한세권은 성공지향형으로 자신의 성과를 위해서라면 편법이든 불법이든 물불 가리지 않는 탓에 주변에 사람이 없는 독불장군이다. 공통점도 있다. 둘 다 지고는 못 살고, 속에 있는 말을 담아두지 못하고, 트러블메이커다.
이 두 남자를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당자영이다. 카리스마 넘치고, 패션 감각도 좋지만 가장 뛰어난 건 업무능력이다. 맡겨진 일은 끝내, 완벽히 해낸다. 한세권과 어떻게 부부가 됐을까 싶지만, 성공을 지향하고 그를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면이 같다. 다른 점이라면 당자영은 문제 해결사다. 한세권이 모사한 사건, 이를 좌시하지 않고 폭로로 일을 키우는 최반석 사이에서 불 끄는 소방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이토록 일을 야무지게 잘하니 본사 임원이 특별 임무를 맡겨 창인시로 보냈는데, 인사팀장으로서의 업무 처리하랴 비밀 지령 수행하랴 바쁘다. ‘해고 전담’ 인사팀장으로 인정받아 묻히기 싫은 피를 제 손에 묻혀야 하는 것도 버거운데, 한세권의 애인 서나리(김가은 분)이 쏘아대는 의심의 눈초리도 피해야 한다. 인사부장이라고 하나 들어왔는데 손발 맞춰 주기는커녕 아직도 ‘가전 전문’ 행세다. 새옹지마라더니, 가전에 끈을 유지하고 있는 게 득이 되어 어려운 고비마다 도움이 된다.
당자영에게는 장·단기 지뢰가 놓여 있다. 장기적으로는 최반석이 해고의 큰 그림에서 이뤄지는 일인지 모르는 채 도와주며 내건 ‘약속’, 언젠가 내 부탁 하나는 꼭 들어줘야 한다는 것이 당자영의 미션 수행에 제대로 걸림돌이 될 것이고. 단기적으로는 서나리의 의심을 거두려다 다시는 엮이기 싫은 한세권과의 ‘재결합설’이 현실이 될 판이다.
미션 임파서블, 업무 불가능이란 없는 당자영이 이 난제들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궁금한 가운데. 좋은 영화나 드라마가 그러하듯이, ‘미치지 않고서야’는 기둥 줄거리만 쭉쭉 밀고 나가지 않는다. 조연들이 곳곳에서 웃음 폭탄을 터뜨린다.
특히 당자영이 얹혀살고 있는 집의 주인이자 친구, 신정아(차청화 분)가 앞으로도 큰 웃음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재무의 달인이지만 불안한 고용시장에서 계약직을 자청하는 신정아 역을 맡은 배우 차청화는 의상부터 동작, 표정까지 홈트레이닝의 진수를 보여주며 대사가 없는 동안에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그래도 가장 큰 만족을 주는 건 주연 정재영과 문소리다. 경험 적고 어린 배우에게 주연을 맡기는 미덕을 알지만, 시청자가 주연배우 연기 걱정하며 불안해할 일은 아닌데. 연기의 달인들이 드라마를 책임지니 마음 놓고 몰입해 보는 재미를 놓치기엔 ‘미치지 않고서야’는 아깝다. 아직 6회까지밖에 방영되지 않았다, 따라붙기에 충분하다. 오늘 밤 9시, 서나리의 의심을 떨치려던 당자영의 야릇한 발언이 최반석과 한세권에게 불러올 소동이 담긴 7회가 방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