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소민의 슬기로운 예술소비]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입력 2021.03.31 15:51
수정 2021.03.31 15:51
“들라크루아는 자유의 여신이 들고 있는 자유, 평등, 박애의 삼색기를 세 곳에 배치했죠, 하나는 여신이 들고 있고, 하나는 저 남자 붉은 허리띠, 흰 속옷, 푸른 셔츠, 그리고 저 멀리 노트르담 사원 꼭대기의 삼색기가 있죠.” - ‘빈센조’ (tvN 드라마 7화) 송중기 대사 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무명이였던 들라크루아를 단숨에 유명하게 만든 작품인 만큼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패러디로 사용되며 그 유명세의 남다름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빈센조’에 등장하며 화제가 됐다.
극중 송중기는 들라크루아의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였고, 7화 엔딩에서는 금가프라자 상인들과 용역들의 난투극 장면과 그림이 오버랩 되며 패러디됐다.
19세기 프랑스 남만주의 전성기를 이끈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1798~1863)의 대표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1830년 완성됐다. “내가 조국을 위해 직접 싸우지는 못했을지라도 최소한 조국을 위해 그림을 그릴 수는 있다”라고 형에게 보낸 들라크루아의 편지에서 고백하고 있듯이, 그는 총 대신 붓을 들고 혁명에 동참했다. ‘역사의 주체가 민중’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세계사적인 작품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자유를 동경하는 낭만주의자인 그의 이상이 고스란히 드러난 이 그림은 많은 사람들이 작품의 주제를 1789년 7월의 ‘프랑스 대혁명’으로 알고 있지만, 정확히는 1830년 7월 28일 발생한 프랑스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그려졌다. 들라크루아는 그림 속에 이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담고자 했으면,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이념을 보여주기 위해 그렸다.
작품에 등장하는 민중들과는 다르게 옷을 걸치고 있는 여인은 실제의 인물이 아닌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자유의 여신’ 리베르타스에서 영감을 받아 표현됐다. 또 이 여인은 의인화 캐릭터인 마리안느라는 프랑스의 자유의 여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자유의 여신은 화면 앞 길거리에 방치된 시신에게서 느껴지는 잔인함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림 속 여인이 쓰고 있는 모자는 프리지아 모자라고 불리는데 로마시대에 자유를 얻은 노예들이 썼던 것으로 이 또한 자유를 뜻한다. 이렇듯 여인은 자유의 상징 그 자체였다.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도 이 모습에서 모티브를 가져 왔다고 한다.
여인 오른쪽에 있는 양복 차림의 소총을 들고 있는 남자가 들라크루아의 자화상이라는 설이 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 진행될 당시 건강 악화 때문에 혁명에 참가하지 못했다지만, 그림을 그려서라도 혁명에 참가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역사가들은 양복 차림의 남자가 공화당파의 유명한 당원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그가 들라크루아 자신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도 한다. 이렇게 화가 본인을 자신의 그림 속에 삽입하는 일은 바로크 시대부터 비일비재하게 있어왔다. 아테네학당의 라파엘로 산 치오나 최후의 심판의 미켈란젤로 부오나 로티 등의 거장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스 공화국을 상징하고 있는 여인이 들고 있는 삼색기는 ‘자유와 평등, 박애’를, 총을 든 어린 소년은 프랑스의 미래를 상징한다. 삼색기는 1789년 루이 16세가 봉기군의 적청색 모자의 표지를 자신의 흰색 문장과 결합하여 탄생한 것이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그린 들라크루아는 낭만주의 시대를 이끄는 대표적인 프랑스 화가였다. 그는 “우리가 그려야 할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물과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려야 한다”며 작품을 제작하면서 실제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실제 상황을 포착해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의 요점을 확대시켜 사건의 중요성을 알리는 것’이었다. 역사의 발전은 형식이나 이념이 아닌 동적인 투쟁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의 낭만주의 사상과 양식은 계몽주의 탄생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또 그는 정확한 묘사를 요구하는 그 시대의 예술 사조를 거부하고 자유로운 붓질을 특징으로 삼았다. 19세기 초반 프랑스의 화단은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팽팽히 대립하는데 모든 면에서 상반됐다.
서양미술사에서 들라크루아만큼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는 화가도 드물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불타는 듯 한 색채와 율동 감을 특기로 하며 ‘주제적인 면’과 ‘양식적인 면’에서 낭만파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화가로서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의 그림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것 또한 사실이다. 당시의 미술계는 앵그르의 품위 있는 여인상이 한참 빛을 보고 있을 때라서 작품이 공개 되었을 때 벌거벗은 여인이 상징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1830년 7월 혁명으로 샤를10세를 추방한 신정부는 8월 9일, 자유주의자로 알려졌던 루이 필리프를 새 국왕으로 추대하였고 샤를10세의 절대주의 체제에 대한 파리 민중의 항거와 새로 탄생된 ‘시민 왕’ 루이 필리프를 중심으로 하는 프랑스 국민 전체의 대화합에 대한 표현으로서 구상된 이 그림을 구입한 후 왕궁에 걸어놓고 새 국왕이 이러한 민중의 바람을 상기시키기를 바랐다.
그러나 새 국왕도 이때까지의 다른 국왕처럼 국민을 탄압하기 시작하였으며 혁명의 불길이 잦아들자 루이 필리프 역시 부유한 지주층과 기존의 부패세력의 편에서 자신의 이권만 챙기는 부도덕한 독재자의 본색을 드려냈다. 이내 그림이 눈에 거슬렸던 국왕은 그림을 떼서 창고에 넣을 것을 명하였다. 필자의 지난 2월 17일 칼럼에서 언급했던 시대를 기록한 풍자화가 오노레 도미에의 시사만화 ‘가르강튀아’를 기억할 것이다. 탐욕스런 식욕으로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먹어치우고, 의자 밑으로는 관리들에게 훈장과 이권을 배설하듯 남발하는 우스꽝스러운 거인으로 풍자된 주인공이 바로 루이 필리프였던 것이다.
새로운 왕은 서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기존의 기득권층만 챙긴 것이 화근이 되어 6월 혁명을 불렀고, 급기야 1848년에 일어난 2월 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나며 프랑스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되었다. 이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창고 속에 박혀 있다가 루브르 박물관에 걸리게 된 것은 프랑스가 민주정치를 실시하게 된 1874년에 가서의 일이었다.
BONUS NOTE:
외젠 들라크루아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전성기를 이끈 화가이다. 그의 작품에는 자연을 구사해 현실을 초월한 진실 속에 상상 세계에서의 인간의 모습과 영웅적인 모습이 되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표상이 담겨있다. 인물, 풍경, 정물, 역사 등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인간의 내적인 감정을 호소함을 표현해내며 근대 회화의 기틀을 마련한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들라크루아는 화가이면서도 잡지에 기고하거나 논문 또는 일기에 자신의 생각을 펼칠 정도로 뛰어난 문필가로도 알려져 있다.. 시인이 되고 싶을 정도로 글 솜씨가 뛰어났었던 그는 특히나 지식인으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시대의 아픔을 간과하지 않았으며 시대의 부름에 앞장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명감을 바탕으로 제작된 가장 유명한 대표작인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프랑스어: La Libert guidant le peuple 영어: Liberty Leading the People)은 외젠 들라크루아가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1830년에 그린 그림이다.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은 정치적 목적을 담은 최초의 근대회화 이기도 하다. 시대의 사상과 정신이 배어 있는 예술은 당대의 정치, 사회, 문화 현상을 반영하는 거울인 것이다.
필자는 들라크루아의 작품 감상을 통해 그 시대를 배우고 더 나아가 새로운 서울시장 선출을 앞두고 있는 우리 시민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흔히들 민중(시민)이 영웅(시장)을 기대하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라고 한다. 민중에 의해 기록될 우리의 새로운 역사에 진정한 영웅이 탄생되어지길 바란다.
홍소민 이서갤러리 대표 aya@artcorebrow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