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올드무비⑲] 밀폐된 공간, 기막힌 역전, 63년 전 이 영화
입력 2020.11.23 03:00
수정 2020.11.22 17:57
‘완벽한 타인’(2018) 그리고 ‘12명의 성난 사람들’(1957)
영화 ‘완벽한 타인’(2018)을 보면서 쫀쫀한 스토리와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가 있다면, 드넓은 풍광 없이 한정된 공간 안에서도 얼마든지 재미있는 영화가 가능하다는 걸 다시금 확인했다. 식탁 위에서 울리는 문자와 전화벨 하나에 얼마나 긴장하고 웃음이 터졌던가 말이다.
이보다 61년 전, 더 좁은 공간에서 더욱 밀도 있는 이야기로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영화가 있었다. ‘12명의 성난 사람들’(1957). ‘완벽한 타인’은 그나마 호화 아파트 안에서 거실, 주방, 방, 욕실, 테라스로 장소이동이나마 이뤄지지만, ‘12명의 성난 사람들’의 주 무대는 12명이 앉을 수 있는 탁자와 의자가 놓인 회의실과 그에 달린 화장실이 전부다. 회의실 문은 밖에서 잠겨 있고 필요한 자료가 있을 때 안에서 노크를 해야 잠시 문이 열릴 뿐이다.
‘완벽한 타인’에는 3쌍의 부부와 남자 1명, 총 7명이 등장한다. 전화기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걸려오는 전화나 문자를 모두 공개하는 게임을 시작하는데, 흥미진진할 것 같았던 장난은 이제 ‘장난 아니게’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는다. 서로 속내 아는 부부니까 괜찮은 게 아니라, 부부여서 더욱 보여줄 수 없는 사생활이 아슬아슬하다.
‘12명의 성난 사람들’에서는 12명의 배심원이 주인공이다. 이들은 살인범의 유죄와 무죄를 가리라는, 반드시 전원일치여야 한다는 판사의 주문을 받는다. 말하자면 단 한 사람이라도 다른 의견이 있으면 배심 포기를 선언해야 하고, 그러면 다른 배심원들에게로 넘어간다. 대신 배심원 전원일치의 판단이라면 토 달지 않고 그대로 판결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때 판사는 의심이 여지가 없다면 유죄로, 의심의 여지가 있다면 무죄로 판결하라고 설명한다. 판사의 말은 법이 지켜야 할 선, 유죄인 사람이 거리를 활보하게 할지언정 무죄인 사람이 감옥에 갇히는 일은 막아야 한다는 법의 정신을 상기시킨다.
6일 동안 재판과정을 지켜보고 판사의 주문을 들은 배심원들은 유무죄 판단을 마무리할 때까지는 방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내부의 화장실 외에는 오갈 수 없는 꼼짝없이 갇힌 신세가 된다. 영화는 가볍게 거수투표로 시작한다. 11대 1, 11명의 배심원이 피고를 유죄로 본 것이다.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관객을 집중하게 만들 줄 안다. 17세 소년이 아버지를 죽여 살인 재판에 섰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정보를 주지 않고 곧바로 출발한다. 배심원끼리 싸우는 과정에서 사건과 범인에 대한 정보, 증인의 정체와 증언내용에 대해 알게 된다. 마치 영문 모르고 싸움 구경을 시작하게 된 터라 상대를 향해 쏟아내는 말들을 통해 사건의 전모를 파악해 가는 형국, 영화나 드라마 앞부분을 놓치고 중간부터 보게 된 기분 속에서 사건의 개요와 상세, 이에 대한 팩트 점검과 가치 판단을 하는 나를 발견한다. 탐정 셜록 홈즈가 되었다가 판관 포청천이 되었다가 지혜로운 왕 솔로몬과 같이 현명한 판결을 하려는 내가 있다.
여기까지는 흥미롭고 즐겁다. 점차 나도 모르게, 나는 배심원 1번에서 12번 중 누구와 비슷한가를 생각하게 된다. 나의 편견, 나의 무지, 나의 속단, 나의 연민을 배심원들에게서 본다. 마치 부족한, 감추고 싶은 내 민낯을 들킨 듯 낭패감이 엄습한다. 그렇다고 피하고 싶은 경험은 아니다, 실제가 아니니까 해 볼 만한 영화적 시뮬레이션(모의실험)이다.
11대 1, 압도적 유죄 판단으로 ‘12명의 성난 사람들’이 시작한다고 이미 말했다. 12명의 배심원 중 8번 배심원만(헨리 폰다 분)이 유일하게 ‘무죄’를 말한다. 그가 말하는 무죄의 의미가, 소년이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유죄라고 단정하기엔 의심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11명의 배심원은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8번, 얼른 끝내고 야구장에 가거나 선풍기도 돌지 않는 회의실에서 어서 벗어나고픈 열망을 꺾는 남자에게 눈총을 쏘아댄다. 모두가 유죄라는데 혼자 딴소리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거나 혼자 잘난 척하는 자라 여긴다.
짐작하겠지만, 영화가 11대 1 그대로 혹은 중립을 지키며 6대 6으로 끝나지 않는다. 약간 애매한 ‘완벽한 타인’의 결말과는 달리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고구마 먹다 꽉 막힌 속에 사이다 같은 청량감을 주며 막을 내린다. 예상된 역전극이지만 8번 배심원은 살인 사건의 결정적 증거물인 칼, 증인과 증언내용, 범인의 알리바이, 변호사의 태도 등에 대해 면밀하게 문제를 제기하며 ‘유죄’를 말한 11명 배심원의 마음을 흔든다. 소년의 입장이 되어 사건 전반을 복기한다.
그저 8번 배심원의 말이 너무 옳아서, 한 명 한 명 설득당하는 것이라면 밋밋하다. 시드니 루엣 감독은 미성년 친부 살인범에 관한 배심원들의 토론과 언쟁을 속도감 있게 밀고 나가면서도 중간중간 쉼표로 배심원들의 성장배경이나 직업, 취미, 가족관계, 일상 에피소드를 가볍게 곁들인다. 팽팽한 긴장에 이완의 쉼표를 넣은 것이다. 동시에 그 쉼표들은 루엣 감독이 심어놓은 복병이다. 쉼표 때 얘기된 내용은 배심원들이 의견이 다른 상대를 공격하는 포인트가 되기도 하고 자신의 마음을 ‘유죄’에서 ‘무죄’로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다양한 문제 제기와 응수, 공격과 방어 속에 11대 1의 판단은 10대 2, 8대 4… 점점 달라져 간다. 글로 설명하니 정말 재미가 없는데, 영화로 보면 이토록 기막힌 역전극이 없다.
영화 속에서 배심원들은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회의실, 비 오기 전 푹푹 찌는 고온 고습의 날씨, 서로를 공격하고 자신을 방어하는 뜨거운 싸움 속에서 갑갑함을 느끼고 땀을 줄줄 흘린다. 보는 사람 역시 그 고밀도의 밀실에 갇힌 것처럼 영화 속 상황이 생생히 느껴진다. 그러다 한바탕 소나기가 퍼붓는다. 영화도 시원한 빗줄기 같은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
사실 ‘12명의 성난 사람들’의 주 무대는 말했듯 법정이 아니라 회의실이다. 회의실에는 12명의 배심원 외에는 아무도 없다. 분명 판사, 검사, 변호사, 피고가 없는데 영화를 보다 보면 이보다 재미있는 ‘법정 드라마’가 있던가 싶을 만큼 제대로 재판이 이뤄진다. 검사나 변호사가 8번 배심원만큼만 의구심을 가져도, 11번 배심원(조지 보스코벡 분)만큼만 사실관계에 대해 꼼꼼히 확인해도, 4번 배심원(E.G. 마샬 분)만큼만 논리에 승복해도, 3번 배심원(리 J. 콥 분)만큼만 자신의 억지와 부조리를 인정해도 그리고 판사가 1번 배심원(마틴 발삼)만큼만 합리적으로 의사 진행을 해도 ‘공정한 재판’이 되리라는 기대를 키운다.
흑백의 영화가 끝나고 나면, 한 명 한 명 배우들의 얼굴이 이름 자막과 함께 나온다. 굉장히 정겹고 뭔가 뭉클하다. 당시에는 좋은 연기를 보여 준 배우들에 대한 존중의 뜻을 담은 엔드 크레딧이지 싶은데, 63년이 지난 지금엔 좀 다르게 다가온다. 시드니 루엣 감독, 헨리 폰다를 비롯해 12명의 배심원을 연기한 배우들은 이제 모두 고인이 되었다. 고인의 된 선구자 배우들의 이름을 모습과 함께 한 명 한 명 되새기는 순간이 특별하다. 또 이제는 모두 이 세상에 없는 분들이 생전에 남긴 영화를 보는 의미도 남다르다. 여자 배심원이 없다든가 기침하는 사람 옆에서도 실내 흡연을 하는 장면 등 지금과는 다른 세태가 자연스레 드러나는 점은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