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올드무비⑬]영화는 끝났는데, 당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입력 2020.10.11 10:34
수정 2020.10.12 08:44
단편 ‘모든 것을 잃기 전에’로 시작해 5년 뒤 장편영화로
단 2편의 영화로 세계적 주목 받은 자비에 르그랑 감독
놀라운 연기력으로 관객 붙드는 소년 배우 토마 지오리아
"영화가 끝났을 때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 까지 꼼짝하지 못했다."(wois****)
"영화가 끝난 후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의 적막과 참담함까지도 영화의 일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yuns****)
먼저 단편이 나왔다, ‘모든 것을 잃기 전에’(2012). 그리고 5년 뒤 장편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가 나왔다. 연극배우 출신의 감독 자비에 르그랑은 데뷔작으로 2014년 아카데미 단편영화 작품상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장편 데뷔작으로는 지난해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상인 은사자상과 미래사자상을 동시에 받았다. 연출작 단 두 편, 하나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들만 보았음에도 세계 유수의 영화제들과 언론이 “주목해야 할 천재 신예”로 일컫고 있다. 도대체 영화가, 연출이 어떻길래 그럴까.
가정폭력을 다룬 영화는 많다. 마치 다큐멘터리 또는 재연드라마처럼 끔찍한 현상에 주목하거나 가정폭력이 근절되어야 하는 사회적, 심리적 배경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는 강렬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도 있다. 또는 미카엘 하네케의 ‘하얀 리본’처럼 은유와 직유가 공존하는 가운데 가정폭력을 철학적 무게감 속에 직면케 하는 수작도 있다.
자비에 르그랑의 영화는 기존의 방식과 다르다. 우선 과장되거나 왜곡된 혹은 문학적으로 표현된 가정폭력의 장면이 없다. 너무나 평이해서 가부장제의 잔재가 엄존하는 나 혹은 이웃의 풍경이다 싶을 정도다. 그래서 혹자는 한 가정을 공포로 내모는 아빠 앙투안만의 잘못인가 생각할 수도 있고, 판사의 말을 따라 ‘누가 더 거짓말쟁이인가’ 중립적으로 판단해 보겠노라 팔짱을 낄 수도 있다. 아빠 앙투안은 폭력적 괴물이 아니라 아버지 노릇에 서툰 남자로 보이기 십상이고, 엄마 마리암을 보면서는 ‘왜 자신의 동생인 이모보다 상황 대처가 더디고 행동력이 없는지’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다. 바로 이 부분이 르그랑 영화의 차이점이자, 이야기 결말부에 가서 관객 자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핵심이 되기도 한다.
영화 줄거리 속에서 차근히 얘기해 볼까. ‘모든 것을 잃기 전에’는 매 맞는 아내이자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가정폭력을 막아 주지 못했던 엄마 마리암(레아 드루케 분)이 딸 조세핀(마틸드 오느뵈 분), 아들 줄리앙(토마 지오리아 분)를 데리고 남편 앙투안(드니 메노셰 분)에게서 탈출하는 하루를 그린다. 학교와 반대로 걸어 다리 밑에서 기다리는 줄리앙을 태우고, 남자친구와의 이별에 눈물 흘리는 조세핀을 태워 마리암은 자신이 일하는 마트로 향한다. 월급과 퇴직금을 떠나기 전에 받아야 하고, 자신을 태우러 오는 여동생을 기다려야 한다. 다행히 동료들이 도와줘서 진행이 순조로운가 했더니 남편이 마트에 온다. 수표책 받으러 왔다는 남편은 필요한 걸 받고도 할 말이 있다며 기다리겠단다. 마리암과 조세핀, 줄리앙은 무사히 마트를 빠져나가 동생 차에 오를 수 있을까.
글로만 보면 참 별것도 아니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처럼 초긴장 속에 화면을 응시하게 하는 영화도 드물다. 여동생 휴대전화의 배터리가 없고, 남편이 마트를 서성이는 것만으로 애가 타고 공포가 밀려온다. 르그랑 감독은 마리암이 당한 폭력을 급히 마트 유니폼에서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유니폼으로 입는 모습에서 보이는 몇 개의 멍으로 보여줄 뿐이다. 아이들이 당한 폭력은 남자친구를 두고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보다 큰 조세핀의 불안, 엄마가 아빠를 잠시 만나러 간다는 사실만으로 터지는 줄리앙의 울음으로 짐작하게 할 뿐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읽으면 제목부터 공포다. 앙투안을 벗어나 친정이 있는 곳에서 살면 폭력은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법의 눈으로 보면, 마리암은 아이들에게서 일방적으로 아빠를 떼어 놓은 엄마이고, 아빠를 ‘그 남자’라 부르며 “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줄리앙의 글은 어른이 시켜서 쓴 글이다. 반면 간호사로 일하는 앙투안이 직장과 거처를 옮겨 아이들 가까이서 살려는 모습은 아버지로서 바람직한 노력이고, 법적 성년이 된 딸은 아니더라도 아들만큼은 격주로 보겠다는 앙투안의 요구는 아버지의 당연한 권리다.
결국, 전화번호를 바꿔도 거처를 옮겨도 앙투안에게서 숨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중립적 법의 테두리 안으로 이 가족의 문제가 들어온 상황 속에서, 가장 심각한 폭력적 상황에 놓이는 건 격주 주말을 ‘그 사람’과 함께 보내야 하는 줄리앙이다. 어느덧 자라 11세가 된 줄리앙은 여전히 어린 소년이건만 아빠로부터 엄마를 지키기 위해 ‘엄마에게는 휴대전화가 없다’ ‘엄마는 집에 없다’ 거짓말을 하지만, 결국 들켜 험악한 궁지에 몰리면서도 어떻게든 혼자 감당해보려 애쓴다. 줄리앙의 불안한 눈빛과 어두운 낯빛, “뒈져라” 절망적 분노, 관객은 줄리앙과 하나 되어 폭력을 체감한다.
영화 마지막 10여 분 전까지 별다른 물리적 폭력도 없는데 긴장을 넘어 공포를 느낀다. 서스펜스 혹은 호러라 할 만한 영화인데, 흔히 등장하는 긴장감 넘치는 음악이나 효과음조차 없다. 여기에 자비에 르그랑 영화의 또 다른 차별점이 있다. 감독은 고조되는 음악이나 신경을 긁는 음향 같은 인위적 소리 대신 앙투안이 누르는 자동차 경적과 문 두드리는 소리와 현관 버저음, 울리는 전화벨 같은 현실의 소리로 긴장과 공포를 조성한다. 폭력 장면에 과장과 왜곡이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설명을 듣다 보면 ‘조미료’ 없는 영화가 민숭민숭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시끄럽지 않을 뿐 두 영화 모두 촘촘하게 현실적이다. 자비에 르그랑 감독은 가정폭력을 다루면서 ‘의도적으로’ 사회적 메시지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다큐멘터리를 지양하고 극영화로 구성하기 위해 서스펜스 형식을 표방했지만, 겉으로 드러내는 폭력의 정도나 음악·음향은 매우 현실적으로 표현했다. 그러한 선택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더욱 두렵고 더욱 소름 끼친다.
인물을 통해 얘기해 보면 더욱 선명해진다. 마리암은 마트 계산원으로 일하는 직장에서는 동료가 “노조대표”라고 표현하고 지점장이 그의 퇴사를 아쉬워할 만큼 똑 부러지게 일을 잘하지만, 집에서는 맞고 살고 남편에게 “싫다” “안 된다”는 말을 못 하고 수동적이다. 어떻게든 ‘대충’ 상황을 넘기기만 하려고 하기에 앙투안의 일방적 스킨십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과 아들의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에도 처음에는 앙투안의 이름을 부르며 “그만하라”고 말할 뿐이다. 지켜보노라면 속이 답답해 터질 지경인데, 이것이 현실이다. 폭력은 한 사람의 건강한 대응력을 앗아간다. 마리암은 아이들을 아빠의 가정폭력으로부터 지켜야 하는 엄마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도 피해자라는 것을 우리가 잊어선 안 된다.
앙투안은 쌍방의 사랑과 일방적 집착을 구분하지 못하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다. 앙투안의 폭발을 보며 모두가 똘똘 뭉쳐 그를 무시하고 외면하는데 어찌 화나지 않을 수 있느냐, 앙투안만의 잘못이 아니다, 라고 얘기하기도 하는데 핵심을 놓친 결과다. 누구나 화날 수 있지만, 누구나 앙투안처럼 표출하지 않는다. 앙투안이 좋은 사람이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니다. 치료가 필요한데 가정 내에서,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라고 해서 묵인하거나 방관하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결말이 보여준다.
조세핀은 18세가 넘어 이 가족의 비극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성인으로서 자신을 책임지고 살아가는 출발선에 선 그에게 필요한 건 화려한 성년파티도 아니고 사랑하는 남자친구만도 아니다. 동생은 어리고, 엄마는 아빠와의 법정 싸움에 매달려 있고, 탈출구라곤 드문드문 만날 수 있는 남자친구뿐이고, 의논하고 상의할 사람 없이 임신의 두려움에 흐느낀다. 가장 두려운 건 생일파티에서 노래를 부르면서도 ‘그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올까 싶은 불안, 제일 좋아하고 잘하는 음악으로도 눌러지지 않는 초조가 조세핀의 오늘이다.
가장 안쓰럽고 또 대견한 건 줄리앙이다. 어리기 때문에 더욱 보호받아야 하는데, 어리기 때문에 주말을 누구와 보낼지 누구와 함께 살지를 내가 아니라 법이 정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 폭력은 직접 맞지 않아도 내가 아끼는 사람이 당하는 걸 지켜보는 것으로도 충격적 가해다. 그러함에도 엄마가 아빠에게 맞을까 봐 염려하고, 어떻게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 보려는 줄리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에서 가장 씩씩하다.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는 순간, ‘그 사람’의 침입을 여린 두 팔로 막아선 모습에선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 없다. 어른인 게 부끄럽고, 마치 내가 판사인 양 ‘객관적으로’ 보겠다고 ‘양쪽 입장 두루’ 살피겠다고 했던 게 애정 어린 관심이 아니라 ‘방관’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다.
모든 걸 다 떠나, 줄리앙을 연기한 어린이 배우 토마 지오리아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두 영화를 볼 가치가 있다. 200 대 1의 오디션을 통해 발탁된 배우, 천재 감독이 알아본 천재 배우. 너무나 사실적으로 표현된 줄리앙의 들숨과 날숨을 통해 전해지는 복잡다단한 심경, 고개를 숙여 보이지 않음에도 느껴지는 ‘그 사람’을 향한 분노의 눈빛, 배우 토마 지오리아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에서 펼쳐낸 감정들이다. ‘모든 것을 잃기 전에’에선 그저 울음으로 공포를 표현하던 꼬마 배우의 급격한 깊이 성장이 느껴진다.
“나이 대비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고, 듣고 호흡하는 방법에 있어서 최고의 배우가 가진 능력을 보여줬다. 어떠한 트릭(속임수) 없이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소화했고, 우리는 그저 어린 배우가 가진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도록 하면서 그의 자질들을 끌어내기만 하면 됐다”. 자비에 르그랑 감독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