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 아저씨 눈으로 보니 달라진 노동시장이 보일리가

데일리안 (dmswnl20@nate.com)
입력 2016.02.14 10:15
수정 2016.02.14 10:15

<신보라의 청년백서>자본가-노동자 이분법 걷어내야 청년 일자리 해법 보여

27일 오후 서울 세종로 소공원 인근에서 열린 노동개악 총파업 수도권 결의대회에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이 칼럼은 2015년 11월 발행한 『2015청년일자리속사정리포트』의 내용을 골자로 하여, 새로운 근거와 내용을 추가해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편집자 주>

청년들이 일하는 곳은 곧 ‘노동시장’이다. 노동시장은 국가의 사회, 경제적 시스템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청년일자리 문제의 해법을 도출하려면 노동시장에 대한 올바른 시각과 옳은 해석을 전제해야 한다.

그동안 필자는 여러 차례 청년고용의 실태와 해법을 논의하는 세미나와 토론회 등에 참여해 왔다. 대부분의 세미나가 그렇듯 청년패널들도 진보·보수단체로 나눠 초청했다. 청년일자리 문제를 논의하다보면, 낮은 취업률, 니트족의 증가, 일자리의 양극화, 정규직 아니면 비정규직을 선택해야만 하는 극단적 선택의 기로에 놓인 청년층의 괴로움, 중소기업의 낮은 임금과 근로조건으로 인한 피해, 청년 취업준비생들을 위한 사회안전망 부실 등에는 이견이 없었다.

문제는 원인 분석과 해결방안이었다. 노동시장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니 해결방안도 달랐다. 노동, 자본, 시장, 정부, 기업 등에 대한 분석도 달라 전혀 다른 주장과 해법을 내세웠다.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현재의 노동시장을 해석하니 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주장을 쏟아내는 것이다.

19세기 마르크스 아저씨 눈으로 보는 21세기 노동시장

1980년대 청년들을 매료시킨 사람은 단언컨대 ‘마르크스’였다. 당시 오죽하면 “20대에 마르크스주자가 아니면 바보”라는 말이 명언 아닌 명언처럼 퍼졌겠는가. 산업이 부흥하고 불평등이 심화되는 시기에 사회를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 생산력과 생산수단의 모순과 갈등으로 정의한 사상가의 논리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다.

마르크스의 논리를 앞세운 노동운동은 돌풍을 일으켰다. 당시 노동운동은 노동3권 보장을 주장하며 더 나은 사회를 위해 기여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식 사회 분석이 매력적이었을지는 몰라도, 결국은 실패한 이념이었다. 사회주의를 내세운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거쳐 최악의 식량난과 인권유린 사태를 빚는 동안, 남한은 개인의 부와 소득이 증대하고 경제발전을 이루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시스템이 우월함을 증명했다. 애초부터 『자본론』은 한국의 변화와 발전에 어울리는 해석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의 한복판인 현재에도 대학가에는 여전히 마르크스의 흔적이 남아 있다. 2013년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파문은 19세기의 이념으로 바라본 21세기 노동시장에 대한 관점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어제 불과 하루만의 파업으로 수천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다른 요구도 아닌 철도 민영화에 반대한 이유만으로 4213명이 직위해제된 것입니다. 정부와 자본에 저항한 파업은 모두 불법이라 규정되니까요. (...) 자본과 경영진의 ‘먹튀’에 저항한 죄로 해고노동자에게 수십억의 벌금과 징역이 떨어지고, 안정된 일자리를 달라하니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비정규직을 내놓은 하수상한 시절에 어찌 모두들 안녕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자본과 경영진 대 노동자의 대립, 강자와 약자의 이분법 구도, 민영화 등 경쟁과 시장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멸시, 노동자는 약자라는 시선 등이 대자보의 단어와 표현들 속에 스며들어 있다.

자본 대(對) 노동자의 이분법을 걷어내자

대자보는 온통 ‘자본 대 노동자’라는 대립구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노동자는 핍박받는 약자이고, 자본과 경영진은 무조건 강자다. 그리고 정부, 자본, 경영진 등 부르주아 계급에 맞서서 노동자들은 필연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해 노동자 중심의 해방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해법으로 이어진다. 정치에 무관심한 청년들이 이를 깨닫고 운동에 함께 나서자는 게 대자보의 주요 모토다.

하지만 사회를 조금만 살펴봐도 우리는 노동자·농민 대 자본가의 대립과 같은 단순한 구도의 사회에 살고 있지 않다. 영원한 노동자도 영원한 자본가도 없다.

20대 창업이 대세인 요즘에는 누구나 CEO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노동자가 되고, 누군가는 자본가가 된다. ‘똘끼’ 있던 평범한 대학생 마크 주커버그가 페이스북을 이끄는 세계적 기업의 자본가가 되기도 하지만, 한국형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아이러브스쿨의 김영삼 씨는 야후코리아로부터 500억 인수 제안을 받는 성공한 자본가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보는 노동자가 되기도 한다.

‘노동의 이동성’은 시대 변화의 핵심 키워드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부모의 신분에 의해 자신의 신분이 결정되는 시대에 살았다. 노비로 태어나면 평생 노비로 살아야 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그러한 시대의 논리였다. 지금은 자본가와 노동가로의 단순한 층위 구분도 어렵다. 과거의 재벌이 현재에도 재벌일 가능성이 적고, 과거의 노동자가 현재에도 노동자일 가능성이 적은 세상에 살고 있다. ‘노동의 이동성’은 자연발생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며, 창의적인 사고와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을 강자와 약자의 대결이라는 단순 구도로 해석한다면, 이제 노동자도 강자와 약자로 나누어 해석해야 할 판이다. 현대자동차 노조의 1인당 평균 연봉은 9700만 원에 달한다. 한마디로 ‘억’소리 나는 임금이다. 제조업 평균임금인 4271만 원의 두 배에 달하는 액수다. '안녕들 하십니까'에서 사회적 약자로 부각했던 코레일 노동자들의 1인당 평균 연봉은 6880만 원이었다. 기관사들도 150시간 일하고 한 달에 700만 원을 받았다. 이 정도면 노동자 앞에 ‘귀족’이라는 단어를 붙여줘야 할 듯하다. 노동자들도 귀족, 중산층, 서민 등급을 나눠야 할 판이다.

반면 똑같은 노동자인데도 처한 환경은 극과 극인 경우도 많다. 한 해 2000만 원의 연봉도 받지 못하는 중소기업 비정규직 노동자가 수두룩하다. 통계청과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노조가 있는 대기업 정규직은 월 평균 392만 원의 임금을 받지만, 중소기업 비정규직(무노조)은 134만5000원을 받는다.

대기업 생산직 노조들이 노동과 자본을 대립시키는, 시대에 뒤떨어진 구도를 계속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임금과 처우 등 모든 면에서 최상층인 노동자들이 여전히 약자라고 우기기 위해서라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 더 많은 이익을 챙기려는 당사자들은 그렇다 치고, 오히려 이들의 기득권 사수의 피해자인 청년세대들이 이들을 옹호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는 참담해진다.

귀족노조 간부는 절대 강자다. 상상을 초월하는 혜택과 함께 해직돼도 조합의 보조를 받아 정규직 연봉을 손에 쥔다. 정년을 보장받는 강자 노동자들에 대한 과보호와 혜택들로 인해 기업이 정규직 채용을 꺼리면서 청년 신규 채용은 없고, 비교적 용이한 비정규직만 양산된다. 그럼에도 임금을 올려 달라며 파업을 벌이는 강자들 때문에, ‘약자’ 국민은 때로는 지하철 파업에 따른 교통지옥의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경쟁과 시장에 대한 멸시와 조롱도 안타깝다

능력 중심의 경쟁이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성장정책과 신자유주의 경제와 같은 시장시스템은 정의롭게 분배하지 못하는 패악의 시스템이라는 시각도 있다. 민영화 등 경쟁을 가속화하는 전략이 노동자들을 열악한 상황으로 내몰리게 하고, 노동시장이 양극화된 것이 경쟁과 자본주의를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적 질서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과연 그러한 해석이 옳은 걸까?

몇 달 전 종영한 TV프로그램 ‘청춘FC: 헝그리 일레븐’을 즐겨봤었다. 청춘의 투지와 열정이 ‘축구’라는 스포츠에 그대로 녹아들어가는 모습도 멋있고, ‘패자부활전’을 통해 꿈을 잊고 살아왔던 청년들에게 다시 축구선수라는 꿈에 다가갈 기회를 준다는 포맷도 흥미로웠다.

여기서 주목한 건 ‘공정’과 ‘경쟁’이라는 가치였다. 누구에게나 경쟁은 참으로 냉혹하다. 다시 축구선수가 될 기회가 공정하게 주어졌고, 누구나 11명 엔트리에 속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결국 자신이 그 멤버가 되기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운동하고, 더 체력을 길러 차별화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경쟁이고 최종 일레븐 멤버가 되는 것은 그 결과다.

청춘FC는 안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공정하지만 경쟁을 통한 선택은 인정받아야 하는 것임을. 비정한 듯하지만 경쟁의 원칙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공정한 경쟁임을 이해하기에 그 룰에 따르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결과를 인정한다. 그렇기에 청춘FC의 도전은 아름답다.

경쟁은 이런 것이다. 누구에게는 비정해 보일지 몰라도 경쟁이 있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도록 자극받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세계에서 하루에도 수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생겨나기도 한다. 일자리의 수는 과거에 비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노동시장에서 경쟁이라는 요소가 없다면 불가능한 결과이다. 조지프 슘페터는 이를 “창조적 파괴”라고 명명했다.

일자리의 양극화가 ‘비정규직법’ 때문이고, 비정규직법은 신자유주의 경제운용의 결과라는 주장은 노동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법을 도출하기 어렵다. 2006년 비정규직법을 처리할 당시 이 법안은 소위 진보진영을 대표하던 열린우리당이 주도했었다. 당시 기업은 비정규직을 무조건 2년 고용한 후 정규직으로 채용하도록 종용하는 것은 노동의 경직성을 강화할 뿐이라며 반대했다. 현재의 일자리 양극화가 생긴 본질적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신자유주의를 그렇게 반대해왔던 진보진영은 책임이 없다고 할 것인가?

노동시장에 대한 편견을 넘어

21세기 노동시장은 분명 달라졌다. 자본과 노동의 대립으로만 설명하기에는 사회의 구성요소가 매우 복잡해졌고, 심지어 노동자층 내에서도 대립과 차이의 요소가 커졌다. 더 이상 노동자 모두가 약자인 시대는 지났다. 공동생산, 공동분배를 핵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실험은 실패로 귀결됐다. 현재로서는 시장경제체제만이 개인과 사회의 부를 창출하고 증대하는 유일한 길로 증명되었다.

우려스러운 것은 경쟁이 결과의 불평등을 정당화한다는 것이기보다는 경쟁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노동시장의 풍토다. 청년들은 자신의 능력을 시험대에 올려보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서 그럴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 노동시장의 진입장벽이 워낙 높기 때문이다. 불과 10년 전, 선배는 취업경쟁에서 자신의 정당한 능력에 맞는 정규직을 얻고 고임금을 받았지만, 똑같은 전공과 같은 기술을 배운 자신은 비정규직과 저임금 상황에 처하고 마는 것이다. 정당한 경쟁을 벌이지도 못한 채 가게 된 길이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결, 강자와 약자의 이분법, 시장과 경쟁에 대한 멸시 등 현재의 노동시장을 둘러싼 문제를 과거의 패러다임으로 설명하려면 한계에 이를 수밖에 없다. 청년층 일자리 문제의 해법은 노동시장을 바라보는 올바른 눈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글/신보라 청년이여는미래 대표

데일리안 기자 (dmswnl2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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