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치마폭에 취하다
이석원 기자 (galamoi@dailian.co.kr)
입력 2014.05.10 09:57
수정 2014.06.07 11:33
입력 2014.05.10 09:57
수정 2014.06.07 11:33
<유럽에 미치다⑧-오스트리아 빈1>합스부르크 600년의 역사 여행
굽이굽이 찬란한 자연의 형형색색 신비로움을 담고 있는 도나우강, 아름답고 순수한 향기가 온 대지를 적시는 알프스, 2000년의 역사를 지닌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Wien 영어명 비엔나 Vienna)을 대표하는 2가지의 이미지는 모차르트, 베토벤, 하이든,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스트라우스 등으로 대변되는 음악의 도시라는 것과 합스부르크 왕조다. 흔히 클래식 음악의 고향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유럽 역사에 있어서 가장 화려한 궁정 문화를 지닌 합스부르크 왕조는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또 다른 자부심이기도 하다.
빈은 그 합스부르크 왕조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숨 쉬는 공간이다. 1273년 루돌프 1세를 시작으로 1918년 카를 1세에 이르기까지 무려 645년 동안 유럽의 절반을 지배했던 왕조. 유럽의 중세를 관통하고, 르네상스와 근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그 합스부르크 왕조의 번영과 쇠락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빈이다.
오스트리아의 역사는 6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성로마제국(독일)의 오토 3세 때 ‘동쪽의 나라’라는 뜻의 독일어 ‘Osterriche’에서 비롯된 것이 오스트리아라는 국명이다. 그러다가 11세기 경 스위스에 자그마한 산성을 쌓고 일대를 지배하던 소영주의 후손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부재하던 대공위 시대 독일의 국왕에 뽑히면서 시작된 것이 합스부르크 왕조. 그 합스부르크는 이후 645년 동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문화유산을 만들어냈고, 오스트리아는 물론 독일과 체코, 폴란드와 헝가리를 아우르는 위대한 음악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빈 여행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역사 여행과 위대한 음악가들의 음악 여행이 될 수 있다. 오늘은 합스부르크의 역사 여행을 떠나 본다.
빈은 크게 링크(Ring) 안쪽과 링크 바깥쪽으로 나눈다. 링크 안쪽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정궁인 호프부르크(Hofburg)를 비롯해 미술사 박물관과 자연사 박물관, 최대 번화가인 케른트너 거리와 빈 영광의 또 하나의 얼굴인 성 슈테판 대성당(St. Stephansdom)이 모여 있는 곳이다.
빈 여행의 출발지로 유명한 케른트너 거리는 과거 합스부르크 왕조 시절엔 왕족과 귀족이 성 슈테판 성당에 가기 위해 화려한 마차에 몸을 싣고 누비던 거리다. 빈 음악의 상징으로도 불리는 국립 오페라극장에서부터 성 슈테판 성당에 이르는 약 600m 정도의 큰 길인데, 지금은 길 양옆으로 화려한 상점과 멋진 카페 레스토랑이 즐비한 보행자 전용 도로다. 1년 365일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온갖 거리의 예술가들로 가득한 공간이다. 전통 복장을 한 음악회 호객꾼이 하루에도 수십 군데서 열리는 음악회 티켓을 들고 여행자를 유혹하는가 하면, 화려한 손재주와 말재주를 지닌 장사치들로도 넘쳐난다.
케른트너 거리의 한 쪽 끝에 엄청난 위용을 드러내며 서 있는 성 슈테판 대성당은 오스트리아 건축 예술의 완성이라고 평가된다. ‘빈의 혼’이라고도 불리는 성 슈테판 대성당에는 슈테플(Steffl)이라고 불리는 137m 높이의 첨탑이 있는데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다. 외벽은 무려 23만개의 벽돌로 지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성 슈테판 대성당은 합스부르크 왕조가 성립되기 전인 1147년에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로 알려진 성 슈테판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하지만 14세기 본격적인 합스부르크의 신화를 쓰기 시작한 루돌프 4세가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으로 새로 만들었다. 체코의 지배자였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의 사위이기도 했던 루돌프 4세는 장인이 세운 프라하의 성 비투스 성당을 따라잡겠다는 일념으로 성 슈테판 대성당을 완성했던 것이다.
성당 내부는 겉에서 보는 것보다 더 압도적이다. 까마득한 천정이 주는 느낌은 차라리 공포감이다. 짙은 회색의 기둥들과 벽들은 성스런 성당이라기보다 두려움의 공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조금 눈을 돌려 주위를 보면 아름다운 조각과 성상화(이콘)들이 빛나고 있다. 제대는 여행자가 눈길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만들어졌으며, 고딕 양식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찬란한 색깔의 햇빛에 성당 자체가 빛나는 보석이 된다.
남쪽 탑과 북쪽 탑에 올라 빈 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 빈 전체는 414.6 평방km로 605.2 평방km인 서울 3분의 2 크기지만 인구는 200만 명이 채 안돼 서울에 비해 훨씬 한산한 분위기 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국제적인 상업 도시이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등 여러 국제기구의 본부가 모여 있는 국제도시다. 그래서 체코의 프라하 같은 중세 도시의 풍미나 프랑스 파리의 평평한 느낌보다는 중세와 근대, 그리고 현대가 잘 어우러진 모습을 지니고 있다.
빈 역사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600년 동안 합스부르크 왕조의 정궁 역할을 했던 호프부르크다. 합스부르크 왕조가 성립된 13세기부터 1918년까지 줄곧 역대 왕들의 거처였던 호프부르크는,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유, 영국의 버킹검과 함께 유럽 3대 왕궁으로 통한다.
6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숱한 왕들이 먹고 자고 마시고 죽어간 곳이다 보니 그 규모는 가히 세계 최고다. 무려 10개의 건물이 단지를 이루고 있다. 왕들마다 자신이 집권하던 시기 새로운 양식의 건물을 추가해 짓다보니 다양한 건축 양식의 박물관이 돼 버린 곳이다. 10개 건물에 들어선 방의 개수만도 2600개에 이른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현재는 오스트리아 대통령의 집무실과 국제 회의장이 이곳에 있다.
호프부르크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곳인 왕궁 예배당은 그다지 크지 않다. 이름 그대로 왕과 그의 가족들이 미사를 보는 공간이다. 그런데 이곳이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데는 ‘천상의 소리’ 빈 소년 합창단이 있다. 1498년 신성로마제국 막스밀리언 1세에 의해 왕궁 예배당의 성가대로 시작한 빈 소년 합창단은 원래 일반인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존재다. 외부 공개가 일체 이뤄지지 않은, 오로지 합스부르크 왕과 그의 가족들을 위한 존재였다. 그런 빈 소년 합창단이 외부에 알려진 것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몰락 때문이다. 1918년 세계 제1차 대전의 패배와 혁명으로 왕조가 무너지고 공화국이 성립된 후 빈 소년 합창단은 스스로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했고, 그래서 비로소 일반인들에게 소문으로만 듣던 그 천상의 소리를 들려주게 된 것이다. 1924년부터 자구책으로 세계 연주여행을 시작한 이후 빈 소년 합창단은 합스부르크의 울타리를 벗어 전 세계적인 합창단이 된 것이다. 지금도 빈을 찾는 여행자들이 매주 일요일 왕궁 예배당 미사에 입장료를 주고 참례하는 것은 빈 소년 합창단의 노래를 듣기 위해서다.
호프부르크와 관련해 가장 유명한 인물은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부인이었던 카롤린 엘리자베스 황후다. 유럽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왕비로 꼽히는 엘리자베스는 ‘시씨(Sissi)’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한데, 아직도 오스트리아 국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국민들의 사랑과는 달리 오스트리아 역사에서 시씨는 ‘비운의 황후’로 통한다. 재능 많고 발랄한 미인이었던 시씨는 사촌인 프란츠 요제프의 눈에 띄어 그와 결혼하게 됐지만, 실상 그녀는 엄격한 합스부르크 왕조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유분방한 여인이었다. 과묵한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사랑을 받고는 있지만 늘 외로움을 탔고, 엄격한 시어머니 조피 대공비는 그런 그녀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4명의 아들 중 첫째가 죽은 이후 양육권도 시어머니에게 빼앗겼고, 황태자였던 아들은 치정에 얽혀 자살하는 등 그녀는 ‘시집’을 잘 못 간 것이다. 결국 우울증과 애정결핍으로 인해 외모 치장에 모든 시간을 투자했고, 그러다가 189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산책을 하다가 한 아나키스트의 칼에 맞아 숨을 거둔다.
엘리자베스 황후 시씨가 불운한 합스부르크의 여인이었다면, 그 보다 100년을 앞서 살았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 유일의 여제이고, 가장 화려하고 강력한 합스부르크 시대를 주도했던 여걸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카를 6세의 장녀이자 토스카나의 대공인 프란츠 슈테판의 부인이다. 그러나 역사책에 따라 마리아 테레지아가 실제 황제였는지, 아니면 남편인 프란츠 슈테판을 대신해 섭정을 한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부왕인 카를 6세가 갑자기 죽자 합스부르크의 모든 영토를 상속받았고, 또 부왕의 국본조칙을 통해 당당한 왕위 계승자였다. 하지만 합스부르크의 힘에 눌려 있던 주변국들에 의해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벌어지고 전쟁 중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 슈테판에게 황제의 위를 넘겨준다. 하지만 전쟁 이후에도 슈테판 1세는 정치와는 담을 쌓고 살면서 부인인 마리아 테레지아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과 쇤부른 궁전을 가꾸는 일에만 몰두해 사실상 마리아 테레지아가 황제의 일을 다 했다. 그러다보니 마리아 테레지아에 대한 공식적인 황제명이 없고 유럽의 일부 역사가들은 마리아 테레지아 집권기를 슈테판 1세 집권기로 표시하기도 하는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숨결을 가장 그윽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 쇤부른 궁전이다. 물론 마리아 테레지아 때에도 합스부르크 왕조의 정궁은 호프부르크였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름 별궁인 쇤부른을 더 사랑해 그곳에서 지내는 것을 좋아했다. 유럽 역사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여성 군주였지만 자신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으로 똘똘 뭉쳐진 남편 프란츠 슈테판이 정성 들여 가꾸고 꾸민 궁전이 그녀에게는 더 아늑했는지도 모른다.
프랑스에 베르사유 궁전이 있다면 오스트리아에는 쇤부른 궁전이 있다고 말한다. 16세기부터 유럽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던 프랑스 부르봉 왕조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는 모든 것에서 경쟁을 해왔는데, 마리아 테레지아의 시기엔 그런 경쟁이 궁전을 짓는 것에서도 드러났다. 루이 14세가 지은 베르사유를 동경하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미 1696년부터 지었던 쇤부른 궁전을 증개축해 오늘날의 쇤부른으로 만들었다. 루이 14세의 손자인 루이 16세가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했으니 말하자면 루이 14세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는 사돈댁 어른인 셈인데 사돈댁 궁전을 능가하는 궁전을 세울 생각이었던 듯하다.
건물의 규모에서는 호프부르크에 뒤지고, 정원의 크기에서는 베르사유에 못미치지만 쇤부른은 예술적인 면에서 결코 그들에 뒤지지 않는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궁전의 외관은 유럽의 그 어떤 궁전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우아함을 자랑한다. 게다가 궁전 맞은 편 언덕 위에 지어진 글로리에테(Gloriette)에 앉아서 쇤부른 궁전을 바라보면, 그 뒤로 펼쳐진 빈 시내와 함께 합스부르크 마리아 테레지아의 영광이 한 눈에 쏙 들어오는 놀라운 경험이 가능해진다.
궁전 내부는 모두 1441개의 방으로 돼 있는데, 그 중 현재는 45개의 방을 개방하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인기를 끄는 방은 ‘거울의 방(Spiegelsaal)’. 이 방은 모차르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추억이 깃든 방이다. 1762년 6살이던 모차르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초대를 받아 처음 쇤부른 궁전에 들어간다. 여기서 모차르트는 천재적인 피아노 연주를 선보이고, 이내 마리아 테레지아의 무릎에서 1살 연상이던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청혼을 한 것이다. 그런 인연 때문이었을까? 모차르트는 1770년 마리 앙투아네트가 16살의 나이에 루이 16세와 정략 결혼 했다는 사실을 알고 깊은 시름에 잠기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종지부를 찍은 곳으로도 유명한 벨베데레(Belvedere) 궁전. 사실 벨베데레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좋은(Bel) 전망(Vedere)의 옥상 테라스’라는 뜻의 이탈리아 건축 용어인 벨베데레라는 이름이 붙은 궁전은 유럽 여러 나라에 고루 존재한다. 1723년 지어진 빈의 벨베데레 궁전은 본래 합스부르크가 아닌 사보이 왕가의 소유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원래 이 궁전을 사들이려고 했는데, 실패하자 쇤부른 궁전을 증개축했다. 그럴 정도로 벨베데레는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던 궁전이다. 1918년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왕인 카를 1세는 바로 이 궁전에서 합스부르크 왕조의 종말을 고하고, 이후 오스트리아는 공화국으로 탈바꿈을 한 것이다.
벨베데레 궁전이 유명한 이유는 이곳에서 오스트리아가 낳은 천재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걸작 ‘키스’와 ‘유디트’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르누보 계열의 색채 마술사로 불리는 클림트는 정숙함과 관능의 경계를 넘나드는 여인과 그 여인을 감싼 황금색 색채로 근대 미술의 새로운 세계를 연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벨베데레에 전시된 대표작 ‘키스’와 ‘유디트’는 클림트 미술의 절정을 보여준다. 벨베데레 궁전에 아침 이른 시간부터 입장을 기다리며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광보다 더 찬란하게 빛나는 클림트의 ‘키스’를 보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위스 산골의 작은 영주에서 시작해 유럽 역사상 가장 화려한 문화와 강력한 권력을 동시에 구가했던 합스부르크 왕조. 자식을 희생시키는 정략 결혼을 통해 전 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합스부르크 왕조는 유럽 문화의 근세와 근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장본인이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막내 딸 마리 앙트아네트의 비참한 삶처럼 굴곡진 역사를 지니고 있는 합스부르크 왕조이기도 하다. 그래서 빈 역사 여행은 화려함과 찬란함을 만끽하면서도 그 위대한 역사 뒤에 숨겨진 권력의 어두움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글 이석원 여행작가 /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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