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분신' 사건을 '정치투쟁' 도구로 삼는 야권

이충재 기자
입력 2014.01.02 17:31
수정 2014.01.02 17:38

민변ㆍ국정원 시국회의 등 '민주투사 장례위' 구성

보수 시민단체들 "고인에 대한 예의 아냐" 비판

서울역 앞 고가도로에서 분신한 이모 씨(40)가 1일 사망한 사건과 관련, 일부 시민단체와 정치권에서 이를 반정부 투쟁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특히 민주당은 이 씨의 분신을 ‘투쟁의 열기’로 승화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민주당은 2일 관련 논평에서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커다란 사회적 울림에 대한 답변이 자기희생이어서는 안된다”며 “박근혜정부의 국민 무시와 민주주의 유린에 맞서기 위해서는 살아서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또 “민주당은 이 씨의 뜻을 가슴에 새기고, 국정원 대선 개입 특검의 관철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온라인에서도 문성근 씨가 “12월 31일에 서울역 고가에서 ‘박근혜 퇴진, 특검 실시’ 펼침막을 건 채 온몸에 쇠사슬을 묶고 분신하신 이모 씨가 운명하셨다”는 글을 리트윗하는 등 진보진영에선 “고인의 뜻을 받들어 정권퇴진 투쟁에 나서자”는 목소리에 확성기를 틀었다.

진보진영 시민단체에선 이 씨를 민주열사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미 참여연대와 국정원 시국회의, 민주언론시민연합 등의 시민사회단체들은 ‘민주투사 고 이남종 열사 시민장례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이 씨가 분신 직전 ‘박근혜 사퇴’ ‘특검 실시’라고 적힌 현수막을 내걸었고, 이씨가 남긴 수첩에서 최근 대자보 열풍과 흡사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로 시작하는 17줄 분량의 글이 발견되는 등 ‘정부에 맞선 민주열사’로 해석하고 있다.

"고인의 죽음 정치적 도구화 말라" "이 씨를 이용한 선동 반대한다" 목소리 울려

이에 대해 “고인의 죽음을 정치투쟁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특히 ‘정치적인 포장’은 물론 “어떤 이유에서든 자살을 미화해선 안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고인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크게 역풍을 맞을 것”이라고 쓴소리를 했다. 그는 “유족들 입장에선 고인의 죽음에 여러 가지 심정이 있을 수 있지만, 이를 부추겨서 민주열사라고 부르게 되면, 현재 정치를 하는 여야 모든 사람들은 무엇이 되는 것이냐”고 따지기도 했다.

시민단체인 바른사회시민회의 박주희 실장은 “망자의 죽음을 두고 정치권이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하려는 것은 아주 나쁜 습관”이라며 “고인이 반정부 투쟁이나 노동운동에 직접적인 활동을 했던 분도 아닌데, 이와 연계시켜서 입맛에 따라 투쟁으로 둔갑시키는 것은 우려스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시민단체 관계자는 “좌파진영에서 전태일의 분신과 고인이 되신 이분의 죽음을 억지로 끼워맞추려고 해선 안된다. 개인의 죽음을 이용하겠다는 계산은 당장 내려놔야 한다”며 “그건 국민들을 바보로 알고 선동하는 일이며 고인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도 이날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이씨의 사망을 이용해 선동하는 행동에 반대한다. 같은 마음으로 이 분의 삶과 죽음을 폄훼하는 작태에 대해서도 분노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민주당 등 야당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이번 분신 사건의 원인이 박근혜정부에 있다는 비판을 내놓으며 ‘반정부 물결’을 키우는데 동조하고 있다.

문재인 민주당 의원은 2일 자신의 트위터에 “안녕하지 못한 정치가 고귀한 생명을 잃게 만들었다”며 “참담한 마음 가눌 길 없다. 그분이 죽음으로 말하려던 뜻 아프게 와 닿는다”고 말했다. 문 의원은 또 “어떤 숭고한 목표도 사람의 생명보다 소중하진 않다. 같은 비극이 더 있어선 안 된다”고 했다.

안철수 무소속 의원측도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었다면 죽음에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촌평했다. 야당 의원들이 이 씨의 빈소를 잇달아 찾는 등 정치권의 조문행렬도 길어지고 있다.

수첩에 남긴 '안녕하십니까' 해석 둘러싼 '공방'

특히 이 씨가 남긴 수첩에 적힌 ‘안녕하십니까’란 제목의 글을 두고 유족 측과 경찰이 엇갈린 입장을 보이고 있다.

분신 현장에서 발견된 이 씨의 수첩에는 동생에게 ‘어머니를 잘 부탁한다’ ‘짐을 지우고 가 미안하다’라는 글이 적혀 있고, 뒷부분에는 ‘안녕하십니까’란 제목으로 17줄 분량의 정부 비판 내용의 글이 남겨졌다.

이에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소속 박주민 변호사는 이 씨의 수첩에는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대자보 형식의 유서가 쓰여 있었다며 “유가족을 상대로 남긴 글이 아닌 국민들에게 남긴 글”이라고 말했다.

유가족과 박석운 한국 진보연대공동대표 등은 2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한국성심병원 이 씨 장례식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씨가 수첩에 남긴 유서를 공개됐다. 유서에서 이 씨는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안부도 묻기 힘든 상황입니다. (중략) 공권력의 대선 개입은 고의든, 미필적 고의든, 개인적 일탈이든 책임져야 할 분은 박근혜 대통령입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 남대문경찰서 관계자는 “수첩에는 이 씨가 편의점에서 일하면서 물품이 들어오고 나간 것을 적은 글부터 다양한 종류의 글들이 적혀 있다”며 “수첩에 ‘미안하다’, ‘행복하게 살라’ 등 내용의 글이 있어 유서형식의 글이 있다고 밝힌 것이고, 수첩 전체에 걸쳐 있는 글들에 대해 보는 시각에 따라 입장이 다를 수 있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 씨가 분신 전날 자신의 보험 수급자를 동생으로 바꿨고 휘발유 통과 앰프, 압축한 연료용 톱밥 등을 준비한 점으로 미뤄 분신을 미리 계획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카드빚 3000만원과 어머니 병환 등의 복합적 동기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유족은 이 씨의 경제상황 등에 대해 “신용불량인 건 맞지만 극단적 선택을 할 정도로 힘들어하진 않았다”고 밝혔다. 또 이씨의 자살 배경에 경제적 이유가 있다는 뉘앙스로 경찰이 설명한 것은 왜곡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이 씨는 지난해 12월 31일 서울 중구 서울역 앞 고가도로 위에서 분신을 시도한 뒤 1일 오전 7시 55분경 숨졌다. 이 씨는 전날 오후 5시 35분경 고가도로에 승합차를 세운 뒤 ‘박근혜 퇴진, 특검 실시’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스스로 몸에 불을 붙여 병원 치료를 받다가 하루 만에 사망했다. 시민장례위원회에 따르면 이씨의 장례는 4일간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지며 영결식은 4일 오전 9시30분께 서울역광장에서 열린다. 장지는 광주 망월동 구묘역이다.

이충재 기자 (cjlee@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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