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이 경제무능했다고 생각한다면 읽어라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13.09.20 11:14
수정 2013.09.20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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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13.09.20 11:19
<굿소사이어티 서평>박정희 경제기적에 이승만 역할 조명
'이승만과 기업가 시대-성공한 나라 대한민국의 기초가 닦인 피와 땀 15년'(김용삼 지음, 북앤피플 펴냄), 이 책의 시작은 박정희 시대 경제기적의 원인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박정희 경제기적에는 이승만의 공헌이 컸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의문이 시작된다. 좌우 모두 경제적으로 무능했다는 비슷한 평가를 내리는 이승만에 저자는 왜 다른 주장을 펼칠까?
이 책은 1948년 대통령 취임이후 1960년 하야 때까지 이승만 정권에서 진행된 산업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책에서 이승만의 진가는 50년 한국전쟁 이후에 발휘되는 걸로 파악된다.
"1950년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서로 다른 두 시각
“1953년, 한반도는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남쪽의 부산에서 북쪽의 신의주에 이르기까지, 한국인들은 죽은 자들을 묻고 잃은 것들을 슬퍼하면서, 그들 생애의 남은 것들을 주워 모으느라 여념이 없었다. 수도 서울에서는 콘크리트와 파편이 뒤범벅이 된 길가에, 텅 빈 건물들이 마치 해골처럼 서 있었다. 수도 주변의 미군 병사(兵舍)에는 수많은 거지들이 외국 군인들이 내버리는 찌꺼기를 줍고자 모여들었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 이라는 자신의 저서 머리글에서 이승만 통치 시기의 1950년대를 절망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침 7시를 전후해서 중앙청이 보이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보면 7~8세의 어린이로부터 성년이 된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제복을 입고 손가방을 들고 혹은 메고 가는 학생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두 씩씩하고 명랑하고 혈색이 좋다. 그들에게는 신생 공화국의 앞날을 책임질 막중한 의무가 주어져 있다. 한국의 교육은 이러한 사명을 충분히 완수할 수 있다고 본다.“
1950년대 후반까지 한미 경제 협의회의 미국측 경제조정관으로 근무한 바 있는 윌리엄 윈 조정관은 유엔 경제 사회 이사회에 참석, '한국의 교육'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한 내용이다. 교육에 대한 이승만의 투자는 한국 경제기적의 초석이 되었다. 교육받은 근로자가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는 이승만 시대에 ‘절망’을 보았고 반대로 윌리엄 윈은 ‘희망’을 보았다.
한국 경제기적에 이승만의 공헌을 잊어선 안된다
이승만이 만든 희망은 무엇일까? 이승만은 신생 대한민국의 경제의 기초를 다져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 안보 부담을 덜고 경제개발에 국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교육 인프라를 확충해 산업사회에 필요한 인력을 대량 배출했다. 농지개혁으로 양반 쌍놈의 계급관계를 타파해 6.25 당시 공산당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었던 농민들을 대한민국의 편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고도성장기에 계층 갈등을 사전에 최소화했다. 저자는 이승만의 한미동맹과 시장경제 추진은 대한민국 번영을 이루는 씨를 뿌렸다고 평가한다. "현재 세계일류기업으로 성장한 삼성과 LG,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대부분의 국내 기업들이 이승만 정권시대 글로벌 기업의 씨앗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 씨앗이 없었다면 글로벌기업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 씨앗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포항제철은 이승만 시대에 시작되었다! 휴전 논의가 한창이던 1953년 4월, 이승만의 특별지시로 철강 산업진흥책이 마련된다. 대한중공업공사가 국영기업으로 출범하고, 연산 5만톤 규모의 평로(구식 용광로)를 건설하기로 한다. 1959년 평로제강공장과 압연공장이 세워진 뒤 정부는 철강공업육성 5개년 계획을 수립해 연산 20만톤 규모의 제철소 건설안을 준비해 미국 국제원조처에 자금지원을 요청한다. 이것이 포항제철의 시작이다.
“국민소득 60달러에 불과한 나라에서 미래의 에너지였던 원자력산업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긴 것은 국가 지도자의 통찰력이었다. 이승만은 그 어려웠던 시절에 노망이 들었다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자력산업의 기초를 닦았다.” p. 304
원자력의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현실을 보면 이승만의 통찰력은 놀랍다. 1956년 2월 '원자력의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한미간 협력 협정'을 맺고 1957년 8월에 국제원자력기구에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한다. 1958년 3월 원자력법을 제정 공포하고 이듬해에는 대통령 직속 원자력원을 설립한다. 당시 20명의 유학생을 선발해 영국으로 유학 보냈고 그들은 한국 원자력산업의 중추가 됐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당시 정책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인터뷰와 기록들을 소개하면서 '산업화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라는 결론을 이끈다.
건국의 아버지로 부국의 밑그림까지 그린 이승만
이승만의 정책이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가 비현실적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이승만은 거대한 계획을 세우기보다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부터 먼저 했어야 했다는 주장이다. 실제 5.16 주체들도 처음에는 이승만이 세운 중후장대한 계획부터 추진하려다 전략을 바꿔 가발이나 봉제 섬유부터 추진하면서 이후에 중공업 원자력 등의 산업을 성공시켰다.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보면 이승만의 미래를 보는 혜안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자료가 매우 희박한 탓에 이승만시대의 경제분야 연구는 진전이 없었다. 1961년 군사쿠데타 이후 많은 자료들이 소실됐기 때문이다. 전세대의 역사를 무조건적으로 매도하고 척결하려는 우리 사회의 경박한 풍토가 낳은 비극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가 객원연구원으로 활동 중인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원장 류석춘 교수)의 활약이 기대된다.
저자 김용삼은 1958년 대전 출생으로 대전고와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뒤 조선일보에 입사, 월간조선 편집장과 경기도 대변인을 거쳐 경기콘텐츠진흥원에 재직하고 있다. 특히 김 씨는 월간조선 기자로 활동 중 황장엽 망명사건을 특종 보도해 대한민국 언론대상을 수상했다.
글/고진석 독서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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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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